사물에 붙여진 이름들
나는 지금 제주도에서 한달살이 중이다.
오늘은 에리히 프롬의 책을 읽다가 '사물을 지칭하는 명사(책상, 램프 등)가 그것이 고정된 실체라고 믿게 한다'는 구절을 보았다. 사물이란 실제로 우리에게 육체적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에너지의 변환과정에 불과한 것인데, 이름을 붙여 불변하는 실재처럼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읽을 때는 말이 어렵기도 하고 와닿지가 않았다.
그런데 한참 뒤 샤워 중에 비누로 속옷을 세탁하다가 갑자기 ‘아, 이런 경우를 말하나?’하고 번뜩였다.
나는 환경을 조금이라도 덜 해치기 위해서 샴푸와 주방세제 대신 친환경 샴푸바, 설거지바 같은 비누를 사용한다. (플라스틱 용기가 배출되지 않고, 성분도 자연에 덜 해롭다.) 이 비누들이 무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비누홀더도 함께 사용해 왔다.
이번에 제주도 한달살이를 하게 되면서 다이소에서 설거지바, 속옷 비누는 구매했는데 집에서 쓰던 형태의 비누홀더(공중에 비누를 띄워주는 형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고민을 하다가 인터넷으로 주문해야 하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한 달 동안만 사용할 건데 괜한 낭비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비누홀더가 없으면 비누를 사용하기가 아주 불편하니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대책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빔(한달살이 숙소의 호스트)과 대화도중 이런 상황을 토로하자 빔이 이렇게 말했다. “비누 홀더? 그게 뭐지? 그냥 저기 예쁜 돌 몇 개 주워서 그 위에 올려놓으면 되지.”
아,
'그걸 왜 안 팔지?' 하며 투덜대던 내가 작아졌다.
‘비누홀더’라는 명칭에 익숙해진 나는 비누 홀더는 그렇게 생겨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비누를 제대로 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자그마한 조약돌 몇 개를 찻잔받침 위에 올려놓기만 하면 그게 훌륭한 비누 홀더 역할을 해주었다. 실제로 이렇게 조약돌로 비누 받침을 만들었더니 돈을 지불할 필요도 없이 요새 유행하는 나만의 개성 있는 DIY 제품이 되었다.
새 물건을 구매하지 않고 원래 있던 것들을 활용해서 새로운 사물로 탄생시키니 환경도 보호하고 그 과정에서 나도 경험치가 쌓이고 꿩 먹고 알 먹기였다.
동시에 이름이 붙여진 이 모든 사물들에 내가 얼마나 경직된 생각을 갖고 있을지 두려웠다.
‘책상은 이렇게 생겨야 하고, 침대는 저렇게 생겨야 하고.' 이름이 그 사물에 대한 생각들을 사전화해서 딱딱하게 만드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책을 보기 편하게 해주는 것, 작업하기 좋게 도와주는 것은 뭐든지 책상이 될 수 있다. 그것이 돌이든 베개든 나무밑동이든. 그 형태와 존재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불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사고체계에 익숙해진 나는 지금까지 ‘어? 책상(고정된 이미지의 책상)이 없네. 책상 하나 사야겠다.'라는 식으로 물건들을 계속 사 온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럼 책상도 되고 의자도 되고 침대도 되는 물건이 있으면 그건 뭐라고 불러야 하지? 책침의? 아니면 새로운 이름을 붙여야 하나?'
사물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없어지기도 하고 새롭게 생겨나기도 한다.
휴대폰이나 노트북은 새롭게 생긴 사물이다. 하지만 이 경계도 점점 애매해진다. 휴대폰보다는 크고 노트북보다는 작으면서 휴대폰도 노트북도 아닌 태블릿이라는 것이 또 새롭게 출시된다. ‘태블릿’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물이 새롭게 탄생하면 이제 사람들은 태블릿을 갖고 싶어 진다. 사물에 붙여진 이름이 소비욕까지 부추기는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소통하기 위해 특정한 사물을 정해진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필요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나를 둘러싸고 있는 무수한 사물들과 그 이름에 대해서 이런 의문을 한 번쯤은 가져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나는 사물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 사물을 지칭하는 명사에 휘둘리고 있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