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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 Apr 20. 2023

게으른 예술가를 위한 변명

에세이 [일상의 낱말들]을 읽고

º [일상의 낱말들]에 등장하는 열여섯 가지 단어 중 '게으름'을 주제로 쓴 글입니다.



 십여 년 전 한 방송사에서 [바람의 화원]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습니다. 화가 신윤복과 김홍도의 일대기를 다룬 픽션 드라마인데요, 배우 문근영과 박신양 주연으로 아주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저도 그 드라마를 아주 재밌게 봤습니다.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을 좋아하기도 했고 드라마에 나오는 두 화가의 창작 스타일과 예술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감동하기도 했습니다. 정확한 상황은 기억나지 않지만, 도화서 선배 김홍도는 현실에 절망하고 붓을 놓으려는 신윤복을 어두운 방 밖으로 끌고 나갑니다. 그 길로 사람 바글바글한 장터로 가 좌판 물건을 구입할 것처럼 들춰대고 닭싸움 투전판에 돈을 겁니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검은 색안경도 써보고 노점에 쪼그리고 앉아 뜨거운 부침개도 호호 불어 나눠 먹으며 사람 구경, 세상 구경을 합니다. 이 외에도 두 주인공은 중대한 상황에서 종이를 앞에 두고 머리를 싸매는 게 아닌 전혀 다른 선택을 합니다. 방에 대자로 널브러져 있다가 방안에 들여다 준 밥을 든든하게 먹습니다. 건강에는 안 좋지만, 술도 한잔 걸치고 지금 당장 그려야 하는 주제와 전혀 상관없는 그림을 그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것을 관찰하고 발견한 것을 토대로 두 사람은 위기 극복은 물론 대중의 마음을 울리는 그림을 완성합니다.

 만약 드라마의 사건들이 실제였다면, 그 시대 바삐 일하던 사람들은 이 두 화가를 게으른 한량이라 손가락질했을지 모릅니다. 며칠 동안 방 밖으로 나오지도 않더니, 어느 날은 대낮부터 막걸리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만 쳐다보고 있으면 그럴 만도 하겠죠. 

 저는 신윤복과 김홍도처럼 시대를 장악하고 대중의 심금을 울리는 화가는 아니지만, 딴짓과 게으름으로 창작의 문을 여는 두 주인공의 변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한 손에 술병을 들고 술에 취해 지붕에 올라 있는, 영화 [취화선]의 주인공 장승업을 위한 변명도 어느 정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규칙적인 직장인들과 다른 생활 방식을 가진 예술가를 위한 변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의 부족한 경험으로 흔히 말하는 ‘신선놀음’ 창작이 가능한 것은 화가 본인이 오랜 시간 그림을 그리며 축적한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위에 등장한 화가들은 사랑하는 그림을 더 잘 그리고 싶은 마음과 실패에 대한 불안에 아등바등한 시간이 있었을 겁니다. 오직 완벽한 그림을 열망하며 방 안에서 몇 날 며칠 무작정 그림만 그리던 시간도 있었을 테고요. 그러다 틀에 박힌 뻔한 그림만 그리는 자신이 혐오스러워지고, 다른 작가를 질투하다 ‘저 인간이 드디어 미쳤구나’ 싶은때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정수리 뜨겁게 지지고 볶고 모든 걸 하얗게 불태운 뒤, 다 포기하고 세상 밖으로 나왔을 때 화가는 방 밖에도 그림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불안과 초조함, 실패하지 않겠다는 이룰 수 없는 욕심을 놔버리니 아무 열망 없이 세상을 찬찬히 바라보게 되고, 그 시선은 나와 내 그림을 다시 마주 보게 합니다. 내 눈꺼풀과 그림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불안과 욕망을 알아채고, 마침내 그 쓸모없는 것을 뜯어냈을 때 그다운 그림, 나 다운 그림이 됩니다. 이 과정이 다시 쌓이고 쌓여 화가의 화풍이 만들어지고, 불안과 두려움에 흔들리던 화가는 스스로 중심을 찾아갑니다. 

 창작에는 숨구멍이 필요해서 전혀 의외의 것으로 꼬여있던 창작의 실마리가 풀리곤 합니다. 그것이 게임이든 음악이든, 춤과 식물 돌보기 아니면 그저 숨 쉬고 멍때리는 것일 수도 있지요. 예술가에게 새로운 활동과 휴식, 게으름은 신선한 공기, 바싹 메마른 숲속의 샘물이자 창작의 돌파구를 향한 몸부림입니다. 그런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자신의 가치를 쉼 없이 증명해야 하는 사회, 시간이 갈수록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서 이 당연한 게으름은 예술가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닌 듯합니다.

 다시 드라마로 돌아가, 신윤복과 김홍도는 백성의 삶을 화폭에 담으라는 왕명을 받게 되는데요, 이제 무얼 그리면 좋겠냐는 신윤복의 질문에 김홍도는 답합니다. 

“일단 잘 자고, 푹 쉬고. 화구통 챙겨서 내일 아침에 여기서 만나자.”

 게으르기 힘든 세상에도 나른한 봄은 오고 가지가지 꽃이 핍니다. 예술가가 아니어도 다들 잘 자고, 푹 쉬고 게으름피우는 봄이 되길 바라봅니다. 너무 자책하지 말고요. 그리고 다음 날 각자의 자리에서 좋은 얼굴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일상의 낱말들 - 닮은 듯 다른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열여섯 가지 단어 

김원영,김소영,이길보라,최태규 ㅣ사계절ㅣ202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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