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만에 친구들 셋이 모두 모여 점심 식사와 커피, 디저트. 또 자리 옮겨 따뜻한 차를 마셨다. 이렇게 셋이 모두 모인 게 1년여 만이다. 밥 먹으면서도 차 마시면서도 밀린 얘기를 와다다다다 쏟아낸다. 어디서 하기도 힘들었던 말 왕창, 쌓아놨던 고민과 해결되지 않는 의문도 와라락 쏟아 놓는다. 햇볕도 따뜻해서 야외에서 마시는 커피 맛이 좋았다. 방문한 식당과 카페 모두 일 하시는 분들이 바쁘고 피로할 텐데도 친절하게 안내해 주셔서 감사했다. 카페의 야외 테라스에서 내내 기웃거리던 비둘기는 오늘 비가 와서 휴업했으려나. 비둘기에게 밥 주지 말라는 안내판 앞에서도 부지런히 테이블 사이를 오가는 둘기를 응원하게 됐다. 힘내자. 너도, 나도. 그런데 둘기 친구는 힘내자는 생각과 시행착오에 대한 고민 없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살고 있는 것 같으니, 나도 둘기 친구에게 배워야겠다.
블로그, 인스타, 트위터. SNS는 어렵다. 그래도 적응하려 노력 중이다. 블로그에 뭐라도 써야 할텐데. 고민하고 고민하다, 우리 둘기 친구 덕분일까. '그냥 쓰자'하고 이렇게 쓰고 있다. 친구들과 보낸 시간이 좋았기 때문에.
그림책 작업을 하며 주말 없이 주 7일을 그림만 그렸다. 그랬더니 이게 몸에 배서 작업이 끝난 이후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다. 주말이면 쉬어야 하는데 쉬지 못하고 자꾸 할 일을 생각하고 초조해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불안해진다. 집에 있으니 머릿속만 시끄러워져 어제는 가끔 가던 조용한 카페에 갔다. 물론 곧 손님이 많아져 떠밀리듯 나왔지만 뭐. 그래도 머리 식히고 마음 식히고 시나몬롤도 먹고. 물론 가서 다이어리에 할 일을 정리하긴 했다. 최근 내가 그림에 대해 하는 생각도 좀 썼다.
나는 욕심이 너무 많다. 그림을 잘 그리려고 한다. 그게 나의 문제다. 그림을 왜 잘 그리려고 할까? 그럴 필요가 없는데. 혼자 그리는 그림에서는 더욱 그렇다. 내 마음에 안 드는 그림, 내 눈에 못난 그림, 이상한 그림을 거리낌없이 마구 그리고 그것을 내 눈에 담을 수 있다면. 흔쾌히 즐거워할 수 있다면. 재밌어할 수 있다면. 오늘 할 일 했다며 웃어넘길 수 있다면. 나에게 그림이 그랬으면 좋겠다. 햇빛 비추는 테라스에서 깔깔 웃었던 것처럼 그렇게 쏟아졌으면 좋겠다. 내 손으로 그린 내 그림에 눈치를 주지 않고 좋아하고 싶다.
몰스킨 수채화 노트를 샀다. 큰 건 부담스럽고 긴장한 채 그림을 그릴 것 같아 제일 작은 ‘포켓형’으로 샀다. 이것도 가격이 꽤 나간 기억. 그런데 내겐 이것도 오버였던 걸까. 이 노트를 받고 종이를 넘겨 보는 순간 온갖 멋지고 예쁜 그림들로 가득 찬 몰스킨 노트가 떠오른다. 그리고 이것을 인스타, 트위터, 블로그에 올려 사람들에게 보여 줄 생각을 한다.(SNS 중독이야, 너) 어떻게 처음부터 예쁘고 멋지고 관심받을 그림을 그릴 생각을 하는지.. 그게 될 리가 있나. 나는 아직 엉키고 뭉친, 열이 잔뜩 오른 그림의 실타래가 속에 가득하다. 내 손과 머리에서 나오는 그림이 최악의 쓰레기여도 종이 위에 그리는 게 우선이고 중요하다. 그러니 그리자. 멋 부리지 말고. 부릴 멋이 어디 있니. 잔뜩 열받은 나의 실타래에 자유를 찾아주자. 그러면 내 숨통도 좀 트일 테니. 그리자. 쓰레기여도. 그리자. 개떡 같은 그림이어도. 그것도 '나'이고 지금의 '나'니까. 그리자.
다시 카페 테라스의 둘기 친구가 떠오른다. 짧은 다리로 테이블 아래를 부지런히 오가던 둘기 친구. 나 혼자만의 그림은 그저 둘기 친구가 밥을 먹듯, 본능에 맡기고 그냥 해야하니 하는 것 처럼. 그렇게 하고 싶다.
요즘 독서 모임에서 니체의 <선악의 저편>을 읽고 있다.
앞뒤 맥락, 이해 여부 상관없이 기억에 강하게 남은 부분을 옮겨 둔다. <선악의 저편> 각주에 실려있으며, 니체 <안티크리스트>의 머리말이라고 한다.
"··· 오늘날 어느 누구도 감히 제기할 용기를 갖지 못하고 있는 문제들을 사랑하는 강함, 금단(禁斷)의 것을 지향하는 용기, 미궁에 이르도록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는 운명. 일곱 가지 고독으로부터 얻는 한 가지 경험. 새로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새로운 귀. 가장 멀리까지 볼 수 있는 새로운 눈.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진리를 향하는 새로운 양심. 그리고 위대한 양식의 경제(經濟)를 지향하는 의지. 즉 자신의 힘과 자신의 열정을 모아서 간직하려는 의지. ··· 자신에 대한 경외. 자신에 대한 사랑. 그리고 자신에 대한 절대적 자유. ···"
이게 내가 바라는 것. 강렬하게.
#그림생각 #그래도이렇게블로그에써서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