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첫째 주, 인기가요 아니고 즉석떡볶이와 스토리보드

by 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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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약속한 저녁 시간 무렵이 되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친구가 일하는 마트 앞으로 우산을 하나 더 들고 가 빗방울 떨어지는 직원 출입구 앞으로 친구를 데리러 갔다. 비 오는 날 우산 없는 친구를 퇴근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가는 것. 이게 너무 새로운 경험이라 재미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태 살면서 누굴 데리러 갈 일이 없었구나.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고, 있으나 마나 한 가로등 조명 아래 아는 얼굴이 나타났을 때의 반가움. 그길로 비에 젖어 더 시커메진 골목을 지나 즉석떡볶이를 바글바글 끓여 먹었다는 따뜻한 이야기. 더없이 완벽한 결말이다.


동네에 이런저런 카페가 생기긴 했으나 왜 그렇게 다 불편한지. 앉아서 책 보기도 불편하고, 뭐라도 끄적거리긴 더 불편하다. 나는 혼자 온 손님이고 둘이 온 손님에게 자리를 양보하다 보니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다. 혹시 다음에 다시 가게 된다면 어디 구석에 짱 박힐 수 있는 곳에 앉아야지. 근데 아마 잘 안 가게 될 거 같다.


봉순이는 요즘 하루 한 시간 이상을 내 배 위에서 식빵을 굽는다. 저녁 6시 이후에 한 번, 밤 10시 이후에 한 번. 봉순이가 원해서 그렇게 됐다. 노골적으로 거실에 좀 누우라는 눈빛을 보낸다. 덕분에 나도 피곤할 때 저녁잠을 잠깐 자곤 한다. 이렇게 딱 붙어 있는 시간이 길어져 그런가. 자기 전에 항상 내 침대 위에 올라와 쓰다듬을 받고 가곤 했는데, 요새는 아예 안 오거나 쓰다듬 받는 시간이 짧아졌다. 나는 너만 좋으면 다 좋다, 봉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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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새로운 스토리보드 작업 중이다. 역시 어렵다. 그림책 작업은 원래 어렵다. 당연한 거지만 또 새삼 느낀다. 어렵고 피곤하다, 정말. 이 하나의 칸을 채우기 위해 이렇게 저렇게 몇 개의 스토리보드를 그려봐야 한다. 당연한 건데. 뭐가 못마땅해서 그렇게 스트레스받았을까? 여태 이렇게 해왔는데.


그림책 작업에서 쉬운 방법은 없다. 그림책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다 그럴 거다. 수없이 그려야 한다는 내 눈앞의 현실이 믿기지 않겠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이고 하나씩 해치워야한다. 내 앞의 두께를 알 수 없는 벽을 두드리고 발로 차고. 멀리서 달려와 어깨로 부딪히다(미드 형사들은 문을 다 그렇게 열던데. 멀리서 달려오지 않을 뿐) 그래도 안 되면 정과 망치로 만만한 곳부터 파고들어 가기 시작한다. 암석이나 콘크리트를 부수는 해머 드릴도 있긴하나, 나는 벽 구석구석을 부수다, 여기다! 싶은 곳을 곡괭이로 본격적으로 깨 나가는 스타일이다. 요령 피울 수 없는 예스러운 작업 스타일. (어느 독자님의 그림이 좀 촌스럽다는 리뷰가 스쳐 간다)



작업을 너무 비장하게 대하는가 싶어 마음을 가볍게 하려 애쓰기도 한다. 그러려면 쉬는 시간을 더 잘 지키고 책상에서 벗어나 잠깐이라도 푹 쉬어야 하지만.. 단호하게 쉬는 시간 지키는 게 참 쉽지 않다. 작업 시간에 충분히 집중을 못 했다는 반성과 그 보상으로 몇 분이라도 더 책상 앞에 앉아있게 된다. 나는 나에게 더 단호해질 필요가 있다. 내 그림에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처럼 내 그림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여유를 내 그림에 들여놓고 싶다.


'해낸다'라는 의지로 불탄 한 주이기도 했다. 내 그림의 새로운 방향을 정했고, 막연하게 이글거리는 마음의 방향을 잡기 어려웠다. 내 결론은, 쓰레기 같은 못난 그림이라도 여러 장 그리면서 해보자는 것. 생각나는 것을 그리고 필요한 것을 그리고, 내가 못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 단순하다. 단시간에 되는 것은 없다. 차근차근, 천천히. 작은 망치에 손가락만 한 정 하나만 주어지더라도 집요하게 파고들어 가 언젠가는 부숴버리겠다는 마음. 그 마음이 있다.


최근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나의 호르몬뿐이다.


IMG_0441.JPEG?type=w1 『아침의 피아노_철학자 최진영의 애도 일기』 ·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스토리보드 #새그림책 #즉석떡볶이 #할수있어 #그러나한번에안된다는걸알고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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