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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만나면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두고,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질 때 그림을 그린다. 몰스킨 포켓형, 작은 드로잉 북이다. 그림은 나를 긴장시킨다. '완벽해야 한다, 잘 그려야 한다'는 압박이 스멀스멀 일어난다. 그래서 작은 드로잉 북에 그림을 그리며 긴장을 푸는 연습을 한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 형태의 정확성에 집착하기 때문에 드로잉 북에서는 어색하고 틀린 형태를 최대한 눈 감고 지나가려 한다. 색을 칠할 때 선의 경계를 넘어가도 괜찮다. 틀리고, 어색하고, 이상하고, 선의 경계를 넘어가기 위해 그린다. 내가 느끼는 것을 더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해 그리는 거니까. 마음에 안 드는 그림을 계속 끄집어내기 위해 그리는 거니까.
안 하던 것을 해볼까? 형광 연두와 초록을 발라볼까? 생뚱맞은 자주색과 빨강을 덧발라볼까? 크레파스와 색연필을 덧칠해볼까? 나는 무엇을 그리고 싶었을까? 그냥 이 생각도 하지 말아볼까? 내가 무엇을 그리고 싶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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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마지막에 있는 불꽃 그림을 그리며 즐거웠다. 붉은색. 마구 뻗어나가는 붉은색. 그리면서 자유롭고 후련했다. 해방감이 들었다. 불꽃 그림을 시작으로 '붉은색' '불꽃''뜨거운 것'을 주제로 작업을 이어 나가도 좋겠단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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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집에서 쉬는 날이면 봉순이는 하루 한 시간 이상을 내 배 위에서 보낸다. 『우주 최강 붕어빵』 작업이 끝난 후, 몸이 쉬는 걸 잊어버려서 주말을 어떻게 보내야할 지 난감했는데, 봉순이의 요구로 거실에 누워 강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이번 주말엔 소파에서 둘이 딱 붙어 책을 보는데, 이게 바로 내가 그토록 바라던 휴식이라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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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순이는 올해로 고등학생이 되었다. 더 오래, 더 자주 체온을 나누자. 매 순간 봉순이에게 충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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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스토리보드를 만들고 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부모님이 내게 보내는 최선의 사랑을 아무 근심 걱정 없이 함빡 즐기던 시절의 풍경이다. 『우주 최강 붕어빵』을 작업하면서도 숲을 빙- 돌며 부는 바람, 바람과 함께 달리는 숲과 초록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기획이 책이 된다면 나와 우리 가족에게 어떤 기록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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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자유로운, 이전과는 다른. 내가 그려온 그림에서 벗어난 그림이 등장하길 바라고 있다. 한 번에 안 되겠지. 조금씩, 꾸준히 해 나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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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보드는 그림책 창작 과정에서 가장 좋아하는 과정이다. 즐겨 쓰는 0.3mm 샤프로 작은 상자 안에 구석구석 꼼꼼하게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그림책 과정 중 나의 상상이 가장 넓게 펼쳐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위험부담이 적어 마음껏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으니 마음도 편하고, 작은 그림 조각들을 새롭게 나열해 조립하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스토리보드 한 장이 너무 빨리 나왔달까? 이렇게 한 장이 뚝딱 나와버리니 여기에 매여서 자유롭게 생각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글에서도 제한이 생긴 느낌. 설악산이라도 한 번 다녀와야하나. 새로운 시야가 필요하다.
♧ 내가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기를.
"우리가 그처럼 바람의 발을 갖고 있고, 모든 것을 달리게 함으로써 건강하게 만드는 한 줄기 바람과 같은 템포와 숨결을 갖고 그러한 바람처럼 해방시키는 방식으로 조소할 수 있다면"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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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커피를 마시고 바닷길을 걸어 집에 돌아왔다.
된장찌개를 끓였고 새 김장김치도 한 포기 꺼내 쓱쓱 썰어 반찬통에 담았다.
편안한 일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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