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분홍 살구꽃이 만발한 어느 봄날이었다. 아버지께서 예닐곱 살 된 우리 앞에 지도를 펼쳤다. 지도 맨 아래쪽은 들쑥날쑥 복잡했다. 한 곳을 검지손톱으로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여기 암탉의 모가지 같이 생긴 곳이 우리가 사는 곳이여.”
“여기를 삽으로 한 번 푹 떠내면 고흥은 딱 섬인디.”
손톱이 가리키는 곳을 보던 식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참말로 요상하구만요. 어째 거그만 가늘당가요잉.”
“워매, 나가 시방 달려가 삽으로 퍼내 불라요.”
식이는 당장이라도 삽을 끌고 그곳으로 달려갈 기세로 소리쳤다.
그날의 기억은 너무나 선명하다. 마치 어제의 일처럼 느껴진다. 식이와 나는 암탉의 목처럼 생긴 곳을 지나 육지의 가장 끝자락에 살고 있다는 것을 그날 알았다.
그 후 우리는 암탉의 목을 지나 도시로 나왔다. 식이가 먼저 나가고 3년 후 나도 나왔다. 어느덧 사십 년이 흘렀다. 그사이 아버지와 식이는 이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떠나신 지 십 년이 흘렀다. 아버지가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살아졌다. 그리고 식이가 너무도 갑작스럽게 떠난 지 3년이 지났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은 그들이 떠난 후, 머나먼 곳에 있는 그들과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지만 이유를 딱히 설명하기 힘들다.
지도를 보던 아버지, 예닐곱 살의 식이와 나, 그리고 살구꽃이 만발한 장면이 수시로 눈앞에 아른거린다. 내 기억의 가장 깊은 곳에 새겨진 바로 그 찰나와도 같은 장면을 잊지 못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한 삽을 떠내면 바다가 될 줄 알았던 곳은 아주 넓었다. 몇 해 전 암탉의 목을 통과하지 않고도 고흥으로 들어가는 길이 생겼다. 여수에서 고흥까지 연육교가 놓였다. 자그마치 다섯 개의 다리가 크고 작은 섬을 이었다. 내비게이션은 다리가 놓인 쪽으로 안내하지만, 한사코 암탉의 목을 향해 간다. 이제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곳이 되어버린 고향은 빨리 갈 이유가 없다. 그래서 슬프고도 서럽다.
읍내를 지나 고향 집까지 4킬로미터이다. 수덕산 산기슭에서 하지기재가 길목을 지키고 있다. 하지기재를 넘으면 지도에 없는 곳, 호산이 보인다. 호산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바다를 앞에 두고 네 개의 마을이 정답게 둘러앉아 있다. 네 개의 마을 중에 호산이란 이름은 없다. 지도에 없는 동네인데 어떻게 된 일인지 터미널 벽에도, 하루에 서너 번 다니는 버스 앞 유리창에도 호산 행이라고 쓰여 있다. 고흥에서는 호산 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식이는 나보다 석 달 먼저 호산으로 굴러들어 왔다. 겨우 석 달 먼저 와서는 툭하면 오빠 행세를 했다. 우리 집과 식이네 집 사이에 돌담이 쌓여 있었다. 돌담 안쪽 우리 텃밭 쪽에 키 큰 살구나무가 있었다. 봄바람이 부는 날이면 살구나무는 우리 집 마당을 연분홍 꽃잎으로 수놓았다.
봄바람이 세게 불면 살구꽃이 내 허락도 없이 식이네 마당으로 날아갔다. 살구꽃처럼 나도 걸핏하면 식이네 집으로 놀러 갔다. 식이네 마루는 우리 집 마루보다 높아서 살구꽃을 구경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고향에서는 모든 것이 오면 곧 갔다. 살구꽃이 피었나 싶으면 졌고, 살구가 익었나 싶으면 떨어졌다. 밀물이 왔나 싶으면 이내 썰물이 되어 저 멀리 사라졌다. 사람도 그랬다. 어제까지 있던 사람이 하늘로 떠났다. 사람이 떠나면 하늘의 별이 된다고 했던가. 그날 밤은 별들이 유난히 총총했다.
아버지가 지도를 보며 우리가 사는 곳을 알려주던 그날, 살구나무에서 살구꽃이 뻥튀기 터지듯 사방으로 펑펑 흩어졌다. 식이와 나는 살구나무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살구꽃이 하르르 웃으며 내렸고 우리는 까르르 웃으며 꽃비를 맞았다.
돌담 너머에서 미소를 머금고 우리를 바라보던 식이 아버지, 그리고 지도를 들고 우리를 오랫동안 바라보던 나의 아버지는 수덕산보다 더 크고 높았다.
식이 아버지도, 나의 아버지도, 식이도 가고 없는 지금 낡은 지도를 보며 아버지가 가리키던 곳을 짚어본다.
연어는 자신이 태어난 곳을 향하여 길고 긴 항해를 한다고 했던가. 어쩌면 나도 지도에 없는 곳, 호산을 향하여 오늘도 헤엄을 쳐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에세이포레 2022.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