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대문

by 오솔길

앞산에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면 내 마음은 고향으로 향한다.

봄바람에 매화꽃잎이 멀리까지 흩날리면 마늘잎이 까르르 웃음보를 터트리고, 아무렇게나 뿌려놓은 시금치도 방실방실 웃던 곳, 지금 고향집은 정적만이 감돈다.

우리 집은 멀리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있다. 겨울이 끝을 보이기 시작할 때면 초록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바다를 건너온 바람이 마당으로 진격했다. 비릿한 바람 속에 봄이 숨어 있었다. 순간 집을 뛰쳐나가 바다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봄만 되면 도시로 가지 못한 서러움이 폭발했다. 봄바람은 귓불을 자꾸만 간지럽히고 지나갔다. 서러움으로 가득 찼던 마음은 한바탕 봄바람을 맞고 나면 신기하게도 잔잔해졌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낸다는 속담처럼 아버지는 자식들을 서울로 보냈다. 그런데 왜 나만은 예외였을까. 그럼에도 나는 왜 부모님께 투정 한번 부리지 못하고 애꿎게도 봄바람에게 화풀이를 했을까.

일 년 내내 편지가 초록대문을 넘어 마당으로 날아들었다. 늦은 밤 어머니께 편지를 읽어주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방에서 들려오는 형제들의 소식을 들으며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서울을 상상하며 잠이 들곤 했다.

좋은 소식이 담긴 편지를 읽을 때면 아버지는 곡조를 붙여서 재미나게 읽었다. 어머니는 좋아서 웃다가도 이내 훌쩍거렸다. 나도 엄마를 따라 웃고 울었다.

그때 나는 슬플 때만 눈물이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다. 안방에서 미닫이문을 넘어 내 방을 건너온 소식들은 내 가슴속에 수를 놓았다. 하나둘 짝을 찾아 떠난다는 소식도 편지가 알려 주었다. 그런 날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슬퍼서 밤새 뒤척였다.

드디어 나도 서울에 있는 형제들과 합류했다. 꿈에 그리던 소망이 이루어진 것이다. 밤마다 아버지의 목소리를 통해 엄마가 듣게 될 편지를 썼다. 내 편지를 듣고 수없이 웃고 울 어머니를 생각하면 밤이 깊은 줄 몰랐다. 편지를 보내는 일은 아버지께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고서야 비로소 끝났다.

더 이상 엄마께 편지를 읽어줄 사람이 세상에 없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 슬퍼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쓰면서 하염없이 울었다.

아버지의 제삿날이 다가오면 고향으로 향했다. 매화꽃이 만발한 꽃그늘 아래에서 엄마는 매화꽃 같은 미소로 나를 반겼다. 보내지 못했던 편지를 꺼내 읽어 드렸다. 이내 엄마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목이 메어 더 이상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내 손에 있는 편지를 가져가 아주 천천히 더듬거리며 읽어 내렸다. 낮게 기운 매화나무 가지를 흔들자 어머니의 머리 위로 매화꽃잎이 우수수 내려앉았다. 매화꽃 박수에 어머니는 수줍게 웃었다.

엄마의 왼손 검지는 짧다. 검지 끝은 앙증맞은 매화꽃잎을 닮았다. 매화꽃잎을 더 닮고 싶은 것일까. 끝까지 호미를 놓지 않았다. 어머니의 왼손 검지는 더 짧아져 갔다. 엄마의 짧은 손가락을 잡고 초록대문을 잠그고 돌아서던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올라오는 차 안에서 내가 물었다.

“엄마, 초록대문 집에서 아버지와 일흔두 해나 살았네요. 긴 세월이었지요?”

차창 밖을 내다보던 엄마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살 때는 긴 것 같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짧은 거 같어.”

엄마는 그 후 오래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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