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건강검진을 했다. 위내시경이 끝나고 간호사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은, 특별히 조치가 필요한 정도는 아니었으나 위에 염증이 있으니 당분간 커피, 술, 자극적인 음식을 피하시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하루 정도는 커피를 참아봐야지 했는데, 검진 7시간 후 나는 디카페인 커피를 들이키고 있었다. 카페인이 문제가 아닐텐데. 점심 즈음에는 그래도 한 수 접어 녹차를 마셨는데, 결국 커피를 하루도 못 참고 위에 부어버렸다.
집에는 커피머신이 2종 있는데, 캡슐을 넣으면 커피가 나오는 것들이다. 각각 돌체구스토, 일리 머신이 있다. 한국에서는 네스프레소, 일리, 돌체구스토 같은 커피머신들이 인기가 많은 것 같다. 회사에는 네스프레소 머신이 있다. 네스프레소 머신은 아주 익숙한데, 내가 첫 직장에 다녔을 때부터 네스프레소 머신은 거기 있었다. 작고 은밀한 수도꼭지 같은 것, 물을 갈아줄 수 있는 물통이 있고, 열면 캡슐을 넣을 수 있는 상부가 있다. 그때 당시의 머신은 엄청 시끄러워서, 호르몬 때문에 예민해진 날이면 '저놈의 커피머신 소리 좀 안 들었으면 좋겠다' 간절히 바란 날이 많았다.
첫 직장 막내 때 내 월간 주요 루틴 중 하나는 선배들과 함께 마실 캡슐을 구매하는 거였다. 네스프레소 캡슐마다 이름이 다르고 맛의 특징이 달랐기 때문에 그 차이를 잘 아는 게 필요했고, 선배들마다 취향과 커피 마시는 빈도가 달라서 적절한 공급이 중요했다. 예를 들면 임신을 준비하는 중인 K과장님은 디카페인만 드신다던가, 커피를 카페인 충전용으로 드시는 P과장님은 카페인이 제일 많이 든 쎈 것만 드신다던가 하는 식이었다. 커피 캡슐이 떨어진 날은 자주 발생하진 않았지만, 가끔 사는 게 너무 정신없고 피곤하고 곤란한, 온 우주의 기운이 모인 어느 날 똑 떨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면 타박은 나의 몫. 부랴부랴 커피 캡슐을 주문했다.
그때 당시의 네스프레소 사이트는 어색한 번역과 좀 요상한 결제 시스템 때문에 나를 애먹였었다. 그러나 지금 사이트에 들어가보면 상단 메뉴도 정렬이 잘 돼있고, 재정비를 좀 한 듯 보인다. 약 10년이 지난 지금, 네스프레소는 그때의 캡슐과 머신은 오리지널 캡슐, 오리지널 머신으로 부르며, 버츄오라는 새로운 머신과 캡슐이 나왔다. 기업형 프로페셔널 머신은 납작한 형태로, UFO처럼 생긴 캡슐을 사용한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는 총무팀이 따로 작은 우주선 같은 캡슐을 하루에 한 번 채워준다. 회사의 기계는 우주선 접시가 구겨지면 꽥하고 죽어서 맑은 물만 뱉어내는 연약한 녀석이다.
회사에 있는 머신은 캡슐을 넣으면 추출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에스프레소로 먹을 수도 있고, 룽고나 아메리카노로 먹을 수도 있다. 이건 사실은 다 물을 얼마나 넣을 것인가하는 이야기다. 추출되는 도중에 커피 캡슐의 특징이 깜빡이며 제시되는데, 예를 들면 '코코아향과 구운 곡물향' 따위가 표시되는 식이다. 표시 화면은 점멸하기 때문에 그게 아무 것도 띄우지 않을 때 나는 그 화면을 바라보는 내 얼굴을 인지할 수 있다. 내 초상과 '코코아향과 구운 곡물향'이 겹칠 때, 사진을 찍어본다. 찍고 나니 꼭 메신저 앱에서 쓰는 동그란 프로필 사진처럼 보인다. 코코아향과 구운 곡물향, 사람.
호텔에서 조식을 먹을 때 내 잔에 직접 커피를 따라주는 곳도 있지만, 요새는 커피머신 사용을 권하는 곳도 더러 있는 것 같았다. 해외에 있는 호텔에 갔을 때 커피머신을 쓰게 되면 그렇게 떨렸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을 할 때의 그 떨림. 어디의 어느 버튼을 눌러야 내가 원하는 그 검은 물을 마실 수 있나요. 어찌저찌 성공해보면 처음 장난감을 작동시켰을 때의 그 소소한 기쁨 같은 것이 찾아온다. 내가 매일 접하는 세계만이 전부가 아니고, 내가 아는 구조만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 데서 불현듯 발견하곤 한다.
살면서 경험하는 커피머신이 다르고 마시게 되는 커피캡슐이 다양하고 또 그것을 줄곧 마시는 사람의 취향이 다채롭듯이 사람마다 처음 커피를 건네어 준 사람도 아마 다를 것이다. 누구였지, 내게 커피를 처음 줬던 사람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무 오래 반복된 기억. 아이처럼 무엇을 완전히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내게도 남아있을까.
그러고 보면 늘 같은 결과물을 내는 기계 앞에서, 나는 왜 이다지도 매번 마음이 다를까. 예를 들면, 퇴사해야지, 같은 마음.
한편 커피머신 앞에 선 당신의 마음 속은 어떤가. 매번 궁금하다. 오늘 하루도 나에게 "커피 한 잔 내려줄까?" 다정하게 권하는 당신의 마음이. 문득 바라보면 어느 새 나를 바라보고 있는 당신의 마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