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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시안 Jan 07. 2020

나도 잘 모르겠다

잘고 가느다랗고 선명한_20200106

 오후 11시 26분에 귀가했다. 오늘은 퇴근하면 집에 와서 대학 원서도 쓰고 파이썬 공부도 하려고 했는데, 벌써 11시 49분이다. 오늘은 일터에서 (당연히) 여러 가지 빡치는 일이 있었지만 가장 많이 힘들었던 것은 장시간 모니터를 바라보느라 굳어가는 내 어깨와 목 부근 근육이 주는 고통이었다.

 하도 야근을 일삼으니까 견마지로를 다할 것 같은 좋은 노예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월요일이 아니라 목요일쯤 된 기분이다. 잘고 가느다랗고 선명한 일상을 파편이나마 기록해두려고 모니터를 부랴부랴 켰다. 등에는 뾰루지가 나고 있고 그동안 등드름이 어쩌고 하는 광고들을 다 스킵했던 내 자신도 이제 스킵할 여력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하루 중 일과시간에는 대부분 목적이 있는 글을 작성한다. 이메일을 작성하거나 슬랙(메신저)으로 업무 지시나 요청이나 보고를 한다. 이 세 가지는 다 다르지만 또 다 비슷하기도 하다. 업무 지시를 할 때는 '~해주세요.' 내지는 '~하세요.' 라고 말한다. 요청을 할 때에는 '~해주실 수 있을까요?', '~가 될까요?', '~를 부탁 드립니다.' 정도로 의문문 또는 부탁한다는 말을 덧붙여서 의사소통 한다. 보고를 할 때는 현상, 주안점, 해결책 또는 현상, 바뀔 점, 시사점 등 삼단계로 나누어서 사실을 표시한다. 의견 제시를 덧붙이고, 옵션을 준다. 그러면 추가 질문이 나오거나 바로 의사결정 사인이 온다. 아무튼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람들한테는 아마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일을 하는 스타일에 따라서, 그냥 '~하세요', '~했어요'가 다인 사람도 있다. 철학이 다를 수 있기에, 일만 잘한다면 지시/요청/보고는 뭐 구분 잘 못한다고 하더라도 괜찮다. 일도 못 하고 커뮤니케이션도 못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둘 중 하나라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제발 뉴비가 올 때 둘 중 하나라도 잘하는 사람이 오기를 기도한다.


 성수기에 사람이 자꾸 바뀌어서 너무 힘들다고 오늘 근무평가 시간에 토로를 했다. 팀장님은 "ㅇㅈ"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별 말씀 없으셨다. 유휴 인력도 없고 인력이 새로 왔다해도 바로 실무에 이렇게 저렇게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사실 별 수 없다. 이 직종 특성상 사람 들고 나는 일이 잦다. 직무기술서 작성도 어려운 작은 회사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나가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자리는 만들면 있는 것이고, 일은 되게 하면 되는 것이고. 아닌가. 뭔가 쓰다보니 내가 너무 회사스러운 인간 같다. 회사 이야기를 할라치면 내 인격이 바뀌는 느낌이 든다.


 오늘 K 디자이너랑 K 마케터랑 한 바탕 했다. 편의상 K1, K2(특정 브랜드 명 아닙니다...)라고 하자. K1은 K2의 지시사항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단 작업을 받았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오자 K2가 K1에게 작업 진척률을 물었다. K2는 간단히 '내일 오후에 드릴게요.'라고 대답했다. K1은 '내일 발행인데 내일 오후에 주신다고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둘은 맞은편에 앉아 근무한다. 파티션이 있어서 K2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K1은 '내일 발행하는 거니까 내일 드려도 괜찮지 않아요? 그럼 오전까지 드릴게요.' 라고 한다. K2는 '제가 수정 요청 드린 게 4시 좀 넘어서인데 두 시간 반 동안 뭐하시다 이제서야 내일 주신다 그러세요.' 어조가 점점 더 격앙된다. K1은 '일단 지금까지 된 거 드릴게요.'라고 답한다.

 자료 주고 받느라 한동안 소강 상태이다가 퇴근 준비를 마치고 자리를 뜨려는 K1에게 K2가 소리친다. 'K1님! 이거 도대체 뭐가 바뀐 거죠?' K1는 끄기 직전의 컴퓨터를 다시 붙잡고 마우스를 몇 번 딸깍이다 '아, 블로그가 아니고 인스타그램이네요.' 라고 말한다. 그러자 K2가 '이건 심지어 썸네일도 없는데요?'라고 말한다. '심지어'라는 단어가 상황을 격화시킨다. K1은 안타깝게도 '썸네일이요?' 라고 대답한다. 전에 K2는 나와 저런 식의 선문답을 한 적이 있다. K1은 말하자면 K2의 강화된(?) 버전의 일꾼인데 지시사항을 이해하지 못해도 질문하지 않는 고질적인 버릇이 있다. K2는 팀장님에게 마치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 같다며 슬랙을 남긴다. 완전 블랙코미디. K1은 주어진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을 거고 K2는 자기 일이 끝나지 않고도 귀가하는 K1이 이해가 안 됐을 것이다.


 사실 상황은 좀더 극적으로 치달았고 둘의 감정은 더 격앙됐었다. 그런 과정을 낱낱히 밝히면 사생활 침해도 그런 침해가 없을 것이며, 나 역시 비참해지는 기분이 들 것 같기에 약간의 각색을 보탰다. 오해를 덜기 위해 덧붙이자면 K1과 K2는 평소에 밥도 곧잘 함께 먹으며, 아무 말 없이도 같이 잘 걸을 수 있는 대전제가 있는 사이다. 하지만 K2는 은근슬쩍 K1에게 반말을 일삼으며, K2는 일을 잘하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근성으로 밀어붙이는 타입인데, K1은 그냥 근무시간에만 일하고 싶고 시키는 것만 하고 싶기에 (물론 추측이다. 심도 있는 대화를 해보지 못해서 내가 오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둘의 일 철학이 달라서 부딪힌 것이다.


 사실 좀더 큰 조직이라면 디자인팀에게 문서로 업무 요청이 가고 디자인팀장이 알아서 업무를 분배해주겠지만 작은 조직이라 마케터랑 디자이너가 직접 대화하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또한 여기서는 마케터 역시 이미지 제작물에 대한 지시사항이 처음부터 제대로 전달되었는지 체크하지 않은 책임이 있다. 업보라는 이야기다. 적어도 지시사항을 전달해주면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질문하라고 하고, 다소 잦은 간격으로 작업 진척률을 체크했다면 상술한 격앙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K1는 '퇴근 시간 다 되어서 일을 주시면 안 되죠! 제가 내일 드린다고 했는데. 저도 퇴근을 해야죠.'라고 말을 했고 사실 그게 틀린 말도 아니다. K2는 '업무 지시가 이해가 안 되면 질문을 하셔야죠. 지금 본인이 뭘 만들어야 하는지도 이해를 못한 거 같은데. 그냥 네네네 대답만 하지 마시고 본인이 이해한 대로 얘기해보세요.'라고 까지 말을 했다. K1이 화가 나는 지점도 이해는 된다. 예를 들어, '내가 시킨 거 이해했어? 이해했으면 이해한 대로 다시 말해봐.'를 시전한 것이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퇴근해버린 K1에게는 전할 말도 없고 말을 전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아서 K2에게만 말을 했다. 본인이 답답한 것도 이해는 되지만은, K1 님에게 너무 그렇게 말하지 마요. 당장 내일 그만둔다고 하더라도 내일까지는 봐야하는 사람인데, 당장 내일부터도 안 볼 것처럼 그러지 마요. K2는 납득하지 못한 얼굴로 애매하게 웃음 지었다. 일은 못해도 근성은 있어야지, 라는 표정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대표님은 일련의 사태를 보시곤, 나에게 다가와 K1이 그러는 게 다 내 탓이라고 (딴에는 농담) 했고 정산서를 편집하고 있던 나는 표정이 썩어서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엑셀의 셀과 셀 사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분노를 삭이며 생각했다. 나한테 K1을 육성시키는 책임을 주면서 권한도 함께 주셨던가? 저 사람이 인격적으로 업무적으로 부족한 것을 '내'가 책임져야 하는가? 사람이 부족해서 작업량이 줄줄 넘쳐 흘러서 마케터가 디자인 작업도 해야 할 지경인데,  지금 성수기에 키맨이 자꾸 갈려나가는 것을 보고도 느끼는 바가 없으신지? 나는 어깨가 점점 더 뭉치는 것을 느끼며, 2018년 여름에 목 디스크 증상이 발발 했던 때의 위기감을 느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 수석(!) 디자이너 C는 불의의 사고로 팔 사용이 많이 불편하다고 얼마 전 사직을 청하였다. C를 이 회사에 와 만난 것이 작년 1월이고, C와 티격태격 하기도 했지만 나름 환상의 케미(?)를 달성하고 있다고 자부한지라 C가 회사를 떠나는 것이 자못 아쉽고 안타깝다. 이제 '아'하면 '어'하고 티키타카를 맞춰가고 있는데, 결국 또 한 사람 보내야하는 것이다. C는 게다가 나와 동갑이고 성별도 같아서 여러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고집이 있는 디자이너지만 실력도 있고, 내가 의견을 내면 처음에는 거부하다가 몇 가지 정도는 들어준다.(...) 순순히 들어주지 않는다는 특질을 기반으로, 의견 제안 통과 시의 희열을 느끼는 나는 변태인가? 나도 잘 모르겠다.


 밖에는 비가 오고, 너무 춥고, 나는 갖고 있던 법인카드로 모범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반항 같은 것이다. 물론 대기업에서 근무할 때야 교통비 청구하면 되니까 새벽 2시에 퇴근할 때에도 그냥 별 생각이 없었지만(야근이 고되다는 생각은 당연히 했다) 작은 기업에서 교통비 청구란 언감생심 꿈도 못 꿔볼 일이지만 뭐 '늦으면 택시 타고 가!'라고 대표님이 전에 말씀 하신 바 있기에 아무튼 타고 왔다. 우리 회사 근처에서 우리 집까지 가준다고 하는 택시가 잘 없어서 오래오래 기다리다가 그냥 모범 택시를 탔다.


클라이언트는 합병도 하고 이래저래 승승장구하는 것 같은데 우리 회사는 조직이 안정되지 못해 큰일이다. 이직하라고 주변에서 성화이긴 하지만 아직은 희망이 있는 것 같기도 한데. 내가 참 미련이 많은 사람 같기도 하다. 회사 얘기 그만해야지.


하나만 더 하고 그만해야지. 회사에서 동료들에게 묵혀둔 간식을 풀었다. 단카방(단체 카톡방을 줄여서 단카방이라고 부른다고 하더라.)에서 입찰을 부쳤는데 K2가 쉬지 않고 자리로 와서 1등으로 간식을 받아갔다. 간식 담당답다.


점심으로 제육 쌈밥을 먹었다. 원래 점심도 안 먹고 일하려고 했는데, 새로 온 디자이너와 대표님과 함께 반강제로 점심을 먹었다. 새로 온 디자이너가 자기소개할 때 해산물을 잘 못 먹는다고 얘기해서, '아, 저랑 식성이 같으시네요.'라고 했더니 대표님께서 '어? 해산물 못 먹어요? 처음 듣는데'라고 놀라며 물으셨다. '네. 하긴, 작년 제 생일 때 회식 했는데 횟집 갔잖아요. 모르셨을 것 같아요!' 라고 대꾸하니까 다들 웃음이다. 대표님 얼굴만 벌겋다. 작년에 생일 때 새우랑 광어 회 먹었나. 가을에는 하모도 먹으러 갔다. 몸보신 시켜주시려고 하는데 '저 해산물 못 먹어요.'라고 말할 수가 없어서 부득불 갔댔다. 덕분에 해산물에 대한 역치가 조금 높아졌다.


 쓰다 보니 날짜가 바뀌었고 내가 이렇게 말 많은 사람인가 싶어 자괴감이.


 목 아프니까 그만 써야겠다. 회사에 일 잘하는 사람 2명 정도 있는데 이게 4명 정도는 되어야 내가 숨통이 트일 것 같다. 너무 머리 아프고, 뒷골 땡기고 힘들다. 내 회사도 아닌데 왜 이렇게 목숨 걸지? 나도 잘 모르겠다.


 오늘 이상문학상 수상을 김금희 작가가 거부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알고 보니 그 상의 수상 조건이 일정 기간 작가의 권리를 회사에 양도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해당 주최 측에서 해명하기를 그게 직원 실수란다. 원래 대상에만 있던 조항을 우수상에까지 확대한 거라고 한다. 대상이나 우수상이나 권리 양도가 별로 타당하지 않아 보인다. 세간에 '수상작을 사람들이 보니까 홍보 효과가 있고, 일정 권리 양도 받는 것은 타당'하다라는 주장도 있는데, 작가에게는 권리랄 것이 저작권 뿐인데 저작권 양도요? 수익을 나누자도 아니고, 홍보비나 청탁 원고 할당 몇 건도 아니고 저작권 양도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근데 이상문학상 기획하고 설계하고 실행하는 사람들이 더 잘 알 거 같긴 하다. 수상은 못해봐서 나도 잘 모르겠다.

 

심보선 시인 시집 제목 <오늘은 잘 모르겠어> 처럼 오늘은 나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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