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는 동안 나는 자랐다

[2편. 명함 새로고침 중]

by 아뵤카도

입사하고 얼마 안되 팀 선배가 소개팅을 갔다가 허탈한 소리를 들어왔다. 상대가 우리 회사가 세제를 만드는 곳이냐고 물었다고 했다. B2B라서 인지도가 낮았어도 그렇지, 그런 상대는 제끼라며 위로했지만 사실 나도 회사에 대해서는 들어와서 알았으니 그 상대가 나빴던 건 아니었다.

일을 배우고 조직에 적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 회사의 매각 소식이 들려왔다.
뉴스에 연일 때려대는 인수 도전 기업들의 소식에 우리 회사 이름이 수차례 오르내렸다.
효성, STX, 아랍의 어떤 자본 등 생각보다 더 많은 회사가 관심을 보여왔다. 그들은 며칠을 나누어 실사를 왔고, 회사 사람들은 삼삼오오 하루에도 몇 번씩 커피를 들이키며 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수 개의 회사에서 사람을 보내 체크리스트를 확인하고 질문을 하는 날들이 지나고 우선협상대상자가 선정되었다.
우리 회사직원 대다수가 바라던 회사였다. 인수합병으로 몸집을 키우는 그룹이라고 해서 선배들은 우려를 보이는 눈치였지만, 주니어들은 그런 것까지 헤아릴 수는 없었다. 회사의 인지도가 곧 나의 가치로 직결된다고 생각하던 그때, 큰 그룹으로의 인수는 설레는 일이었다.

입사한 지 9개월도 안되어 사명이 바뀌는 일로 인해 명함이 2개가 생겼다. 우리 팀장님은 삼성을 제외한 현대, LG, SK 4대 그룹의 명함을 다 갖고 있게 되었다며 보여주셨다. 신기한 일이었다.

기술을 나누어 그룹교육을 받고, 시스템을 이관받아 우리 회사에 맞게 바꾸고 개발하고, 하는 일을 브리핑하며 자연스럽게(또는 잡음을 겪으며) 인수기업에 녹아들었다.

회사가 주인이 생기면서 본격적인 투자가 시작되는 덕에 금세 활기를 되찾고 업무가 제자리를 찾았다. 최전선에 있었던 선배들의 기억은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내 기억은 그랬다.

잠시 안정기에 닿나 싶더니 급작스럽게 중국 사업장에서 사고 소식이 들려왔다. 화재였다.

공장 하나가 전소되었다고 했다. 선배들은 짐을 꾸려 비행기가 되는대로 중국으로 갔다. 장비가 문제였다.
선배들은 런닝만 입고 그나마 연기만 먹은 장비들을 찾아 손으로 닦는 사진을 보내왔다. 새카만 화재 현장에서 시커면 검댕이 묻은 장비를 닦곤 허연이를 보이며 찍은 사진이었다.

제품을 만드는 장비가 고가라고 듣긴 했지만 회사가, 선배들이, 이렇게 내 것처럼 생각하는 게 신기했다.
그들은 수일, 수주, 수개월을 밤낮없이 닦아 꽤 많은 수의 장비를 살려냈다. 지금 구성원들은 아마 모를 테지만 우리는 그 화재에서 전소한 장비 한대를 한국으로 들여와 한동안 전시했다. 잊지 말자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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