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 굴러들어 온 돌들 사이 잘 버틴 돌]
중국사고가 어느 정도 정돈되어 갈 때쯤 나는 기획업무로 자리를 옮겼다. 신규공장을 건설하게 되면서 조직이 커졌고, 새로운 팀이 생기게 되었던 거다. 타 조직에서 임원을 따라온 선배와 같이 생판 모르는 일을 했다.
어떤 때는 기원제라며 떡을 이고 지고 산에 올라 절을 했고, 어떤 때는 공사회의에 들어가 일정을 점검하고, 어떤 때는 족구하고 오리고기를 구워 먹는 행사를 준비했다.
공사 때는 사고가 가장 중대한 리스크였기 때문에 다른 회사의 사고 모니터링을 하고 안전점검 주제를 뽑아내는 것도 내 몫이었다. 그때에 나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 태중에 아이를 품은 채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세월호 사고보고서를 썼다.
그게 휴직 전 마지막 업무였고,
추가 구조자 없음.이라는 보고서를 끝으로 업무를 마무리하고 아이를 낳으러 갔다.
아이가 돌이 채 안된 무렵, 회사 임원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얼른 복직하라는 재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사 중에 기어이 사고가 터졌고, 모두가 비상사태였다. 아까운 분들이 현장에서 돌아가셨고, 누구의 책임을 물을 새도 없이 검경이 들이닥쳤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회사일은 내 일이라는 큰 책임을 느끼던 의로운 젊은 시기였고, 생명을 안고 돌보는 나에게 안타까운 희생은 아기를 맡기고 출근하는 나의 수고로움보다 값졌다.
도우미와 친정엄마에게 8개월 아기를 맡기고 사무실에 나왔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수십일을 밤새 조사받고 자료를 준비하느라 녹초가 되어버린 동료들이 마실 물이나 떨어지지 않도록 무거운 정수기를 채우는 게 유일한 도움이었다.
시간은 흘러 정권이 변할 때마다, 법이 강화되고 처벌이 무거워질 때마다 조직이 생기고 규모가 커졌다. 부서 안에 사람들은 점점 많아졌고 신입보다 경력이 더 많이 들어왔다.
업종 내 근무자는 많아도 업종 자체가 워낙 좁다 보니 한 회사에서 경력자들이 많이 오는 현상이 있었다. 우리는 그 회사를 사관학교라고 불렀고, 사실 여태껏 우리가 어딘가의 사관학교였다. LG-SK-SS으로 이어지는 입사와 퇴사행렬은 급여를 올림과 동시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종의 방법처럼 여겨졌다.
나는 이 안에서 머물고 버텼다. 새로운 친구들보다 현장을 더 잘 알고, 히스토리를 기억하는 건 변화와 부침이 잦았던 우리 회사에선 나의 강점이 되었다.
잘 지내던 어느 날, 새로 굴러들어 온 돌은 나의 애사심을 반으로 쪼갰고 급기야 그 일로 인해 나의 팀장은 팀장자리를 내어 놓으면서 한 사람은 퇴사를 했고 나는 원형탈모를 겪으며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