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는 동안 나는 자랐다

[4편. 출근대신 격리]

by 아뵤카도


그 일은 돌이키기 싫기도 하고 이미 일기장에 대서사를 써두었으니 접어두겠다. 기회 되면 익명을 빌어 블라인드에는 남겨봐도 될 듯하다.

회사에는 온갖 감염병이 몰아쳤다. 그 처음은 메르스였다. 중동에 다녀온 사람이 낙타를 탔다던가 낙타의 우유를 마셨다던가 했던 일로 감염되면 매우 높은 치사율을 보이는 덕에 회사는 비상이 걸렸다. 모두가 경험이 없었기에 머리를 맞대고 내놓은 대안이 고열 증상이 있는 사람의 출입을 막자는 거였다.

내가 속한 조직에는 보건팀도 있었는데 일손이 부족하니 도와야 했다. 마스크를 쓰고 각 출입문마다 서서는 체온을 쟀다. 귀체온계와 소독솜을 들고 출근하는 수만 명의 사람들의 불만과 귀찮음을 들으며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그때는 겨울이었고, 고열인 출근자는 발견되기 힘들었다.
매일 수십 명이 조를 짜 새벽같이 출근해 마스크를 쓰고 남의 체온을 재고는 한 식당에 모여 올갱이국밥을 아침으로 먹었다.
그때만 해도 감염병은 낙타의 실물을 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우스개로 낙타우유를 먹으면 옮아 죽는 희한한 소리일 뿐이었다.

그 뒤, 메르스가 잊힐 때쯤 코로나가 닥쳤다. 이번엔 박쥐였다. 중국 우한시 어디에서 발생해서 감염자와 사망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없었던 게 중국 내부에서 전파를 막기 위해 이동을 제한한다는 소식이 들렸고 중국에 사업장을 둔 우리 회사는 주재원을 비롯해 구성원의 한국-중국 이동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졌다.

몇 달이 지나도 사그라지지 않던 코로나는 우리나라에도 들이닥치더니 급기야 감염자는 번호로 매겨져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알림 문자로 날아들었다. 사생활침해를 문제 삼을 겨를도 없이 병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기 시작했고 우리는 타인의 가벼운 기침에도 예민했다.

8월의 어느 날, 출근버스를 타고 회사에 도착했는데 주차장을 통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그 버스에 우릴 다시 태웠다.
나는 그때 둘째 아이를 품은 임신부였다.
회사는 나를 다시 집으로 돌려보냈고 거주지 구청에서는 격리 통지서와 쓰레기봉투를 문 앞에 걸어주었다. 각 국의 정부가 서로 입국과 출국을 막아세웠고, 급기야 마스크가 부족해 사재기가 벌어졌다. 나는 두 번, 총 30일을 격리당하며 2020년을 보냈다.
다시없을 두려운 휴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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