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부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취업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전공을 공채시스템에 우겨넣느라 얼마나 많은 억지를 부렸는지.
유일하게 '전공무관'인 영업/마케팅 직무에 지원하고는, 소비자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는 마케터가 되겠노라 자소서와 면접 이곳저곳에 자신있게 선언했다. 마케팅이 어떤 일을 하는지 글로만 이해해놓고 말이다.
그렇게 들어간 회사. 입사하자마자 인사직무에 자리가 났다는 공고를 보고는 이거다, 싶어 이번에는 직원들의 심리를 정확히 꿰뚫는 인사인이 되겠노라 자신있게 선언했다. 알아야할 것은 회사의 마음인줄을 모르고.
어떻게 억지로 자리는 차지했는데, 업무에서 전공을 살린다는건 불가능이었다. 그럴 업무가 별로 없었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전공을 살릴 기회가 생겼을 때도 내가 관련 전공을 했다는 사실은 부끄러움만 주었다.
회사에 들어오려 학점관리를 했을 뿐, 내게는 아무런 지식이 없었다.
팀 선배, 동료들의 화려한 능력과 업무경험 앞에 나는 늘 작아졌다.
성실한 학교생활 외엔 자랑할 이력이 없는, 어린 나이와 성실함만이 무기였던 내게는 아무런 능력이 없었다.
동기들은 코딩을 하거나 디자인을 하거나 숫자계산을 했다. 인사 업무에 필요한 역량이란 대체 무엇일까.
화려한 피피티를 만들지도, 영리한 액셀시트를 만들지도, 유려한 문장의 보고서를 써내지도 못했다.
잘하는 것이라고는 약간의 언변과 순발력. 겨우 상황을 모면해내는 능력 정도.
Impostor Syndrome: 가면증후군 / 사기꾼증후군
자신의 성취가 실력이 아닌 운으로 생긴 '가면' '사기' 같다고 느끼며, 과대평가된 능력으로 남들을 기만하고 있다고 느끼는 심리. 언젠가 진짜 실력이 드러날 것이라는 두려움과 무력함을 느낀다.
그렇게 나는 매일 밑천 없는 장사를 하러 출근을 했다.
어느 순간 상사가 해주는 칭찬도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운좋게 해낸 업무 몇가지와 어린 나이가 주는 명분의 거품이 언제라도 꺼져서 내 무능력을 들킬 것 같았다. 새로운 것을 시키면 금방 드러날 민낯이 두려웠다.
다른 직무의 동기들을 보면 그 두려움은 배가 됐다. 나는 이 회사를 다닌다고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3년차. 들키지 않으려 같은 업무만 하기엔 남은 날이 많았고 새로운 직무를 도전하기엔 늦은 것만 같았다.
그래서 대학원을 선택했다. 능력이 없다면 지식을 쌓자. 아는게 많아지면, 할 수 있는 말이 많아질거다.
대학원 진학을 위해 퇴사하겠다는 말에 상사는 "졸업하면, 그때는 뭐할건데. 이만한 곳 있을까?"라고 물었다.
이만한 곳은 없어도, 내 자신에겐 조금 더 당당해질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