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루머의 루머의 루머>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끌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꾸준히 인기 있는 작품인 데다 시즌 4까지 제작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별 기대 없이 첫 에피소드를 보기 시작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시즌 4 마지막 에피소드를 보며 시큰해진 콧잔등으로 눈물을 닦는 내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네 개의 시즌은 각각 시청자에게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그러니 유치한 하이틴 드라마인 줄 알고 봤다간 큰 코 다친다.
주인공 클레이에게 정체 모를 카세트테이프 7개가 전달된다. 테이프를 거의 쓰지 않는 요즘이니 창고에서 구닥다리 카세트 플레이어를 가져올 수밖에. 플레이어에 테이프를 넣고 재생 버튼을 누르자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나야, 해나. 해나 베이커.
지금부터 내가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
얘기해 줄 테니 가서 팝콘이라도 챙겨 와.
지금 이 테이프를 듣고 있다면,
너도 그 이유 중 하나야.
틀림없이 해나였다. 클레이와 같은 학교에 다니며 영화관에서 같이 아르바이트를 했던 친구 해나 베이커. 그녀의 목소리임을 알아차린 클레이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해나는 얼마 전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죽음 이후 학교는 침울함에 빠졌고 복도 곳곳에는 자살 방지 포스터가 도배되었다. 왜 그녀는 죽음을 선택했을까. 학생들은 단순히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짐작했다. 학교 또한 해나의 죽음이 학교 생활 부적응에서 비롯된 것이라 판단하고 학생들에게 "힘든 상황에 있다면 언제든 도움을 청할 것"을 강조했다. 그렇게 그녀의 죽음이 만든 파동이 잔잔해질 때쯤 클레이에게 해나의 테이프가 전달된 것이다. 이 테이프에는 주변인들이 추측해낸 이유가 아닌, 해나가 죽어야만 했던 진짜 이유가 녹음되어 있었다.
첫 번째 테이프는 그녀의 비극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설명한다. 리버티 고등학교로 전학을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학기 초, 해나는 학교에서 소위 '잘 나가는' 저스틴에게 대시를 받는다. 번호를 교환한 날 저녁 저스틴은 해나를 공원으로 불러내 데이트를 하고. 평범한 하이틴처럼 보이겠지만 문제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데이트를 하던 중 저스틴이 해나의 사진을 찍었는데, 구도 때문에 해나의 치마 속까지 찍혔기 때문이다.
다음 날 저스틴이 운동부 친구들에게 해나와의 데이트를 자랑하며 문제의 사진을 보여주고, 이내 학교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해나가 저스틴과 공원에서 관계를 가졌다는 것이었다. 학교가 늘 그렇듯 소문은 급속도로 번지기 마련이다.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저스틴과 자신이 지나갈 때마다 수군거리는 학생들을 보며 상황을 눈치챈 해나는 어느새 '헤픈 여자'가 되어 있었다.
비록 질 나쁜 소문으로 고생했지만 해나는 곧 친구를 사귄다. 자신과 같은 전학생인 제시카. 상담 선생님이 이어준 인위적인 관계였으나 전학생 신분으로 의지할 곳 하나 없던 둘은 금세 친해진다. 자주 가던 카페에서는 알렉스와 친해지며 셋은 같이 어울려 다니게 된다.
미국은 다를 줄 알았는데 홀수 무리는 어딜 가든 관계가 틀어질 가능성이 농후한가 보다. 알렉스와 제시카가 눈이 맞아 사귀게 되지만 해나에게 이를 알리지 않고 몰래 데이트를 하다 해나가 일하는 영화관에서 덜미를 잡히고, 해나는 엄청난 배신감과 서운함을 느낀다. 이로 인해 세 사람의 우정은 이전으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흠집이 나버린다. 이후 제시카는 해나에게 다시 한번 큰 실망감을 안겨 주는데, 알렉스와 헤어진 뒤 저스틴과 사귀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스틴이 해나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알면서도 말이다. 여기까지가 첫 번째 테이프의 내용이다.
1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시즌 1은 각 에피소드당 한 명의 인물이 주가 되어 해나와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전개된다. 해나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끝내 삶을 끝내야만 했던 그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심리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라 생각한다. 다만 성폭력, 마약, 폭행 등 자극적인 요소가 많아 시청에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으니 유의하시길.
시즌 1을 보는 내내 답을 고민했던 질문이었다.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면 학생들 대부분은 어디서 주워들은 소문들을 가지고 누구를 멋대로 판단하고 때로는 폄하하기 일쑤였다. 쟤는 작년에 소문이 안 좋았으니 학기초에 무리에 낄 수 없게 확실히 따돌려야 한다는 둥 정당화할 수 없는 배척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물어뜯지 않으면 내가 물어뜯기는 사회에서, 감히 해나 같은 친구를 감쌀 수 있었을까? 윤리적으로 답하자면 너무나 쉬운 질문이지만 현실에서는 굉장한 리스크를 감수할 결심을 해야 한다. 해나의 편에 섬으로써 나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헛소문, 괴롭힘 등을 견뎌내야만 하는 것이다.
해나와 가깝게 지냈던 아이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결국 해나를 떠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해나에게 누명을 씌웠고, 다른 누군가는 그녀를 웃음거리로 전락시켰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해나와 절친한 사이가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를 괴롭혔다. 윤리적으로만 보면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들이지만 그들의 입장에 섰을 때는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가 가능하다.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함이었다. 해나의 손을 놓지 않으면 나도 같이 추락하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해나의 손을 매정히 뿌리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해나를 무참히 짓밟고 일어선 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지옥 같은 학교를 벗어나 집으로 오면 편히 쉴 수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해나의 부모님은 운영하던 가게의 재정난으로 고민이 깊었고, 딸의 학교 생활은 그들의 안중에서 벗어난 지 오래였다. 힘든 학교 생활을 버텨내고 있는 해나에게 필요했던 건 부모님의 관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해나에게 충분한 관심을 주지 않았다. 결국 해나는 마음 편히 기댈 곳이 그 어디에도 없음을 느끼고 안타까운 선택을 한 건 아니었을까. 마음이 무거워지는 순간이다.
시즌 2부터는 또 다른 질문이 시청자의 앞에 등장한다. 해나의 테이프에 등장한 아이들이 해나의 죽음 이후에 행복한 삶을 살아도 되는 걸까? 해나는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과거의 일을 스스로 반성했다고 해서 해나에게 주었던 상처가 없던 일이 되는 걸까? 나는 마지막 시즌까지 이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한 에피소드에서는 아이들을 용서할 수 없다가도 다른 에피소드를 보면 '그래, 평생을 죄책감에 짓눌려 살아가는 건 잔인해'라고 생각하며 못내 그들의 행복을 빌어준다. 내가 끝까지 줏대를 세우지 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렸던 건 아마 두 입장을 모두 경험해본 적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이 질문은 사람의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심하게 갈릴 것 같으므로, 나는 우선 답을 내리지 않은 채 지나가려 한다. 지금보다 더 성숙해졌을 때 이 드라마를 다시 보게 된다면, 그때는 나만의 답이 완성되어 있지 않을까.
시즌 2, 3, 4를 보며 실망한 사람들이 많았나 보다. 대부분의 리뷰가 시즌 1 내지 시즌 2까지만을 추천하며 이후 시즌에 아쉬움을 표현했다. 굳이 시간 낭비하긴 싫어서 시즌 1까지만 보려 했지만, 이 작품은 중도 하차하기 어려울 정도로 쫄깃한 끝맺음을 자랑한다. 지루한가 싶다가도 마지막 5분에서 온갖 관심을 끌고선 마무리. 결국 시즌 4까지 완주한 입장으로서 소심하게 말하자면... 시즌 3까지는 볼 만하다. 시즌 4는 캐릭터에 대해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장면이 상당히 많았다. 그렇다고 시즌 3이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새 캐릭터인 전학생 아니가 난데없이 이야기 흐름의 중심을 꿰차면서 욕을 많이 먹었다. 제작진의 입장에서는 시즌 3를 이끌어가기 위해 필요한 캐릭터이기도 하고 늘어지는 이야기에 나름 분위기 전환을 꾀한 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실패였다. 구글에 '13 Reasons Why Ani (루머의 루머의 루머 아니)'만 검색해도 연관 검색어로 '13 Reasons Why Ani annoying (루머의 루머의 루머 아니 짜증남)'이 뜨니 말 다했다.
그래도 하이틴 드라마치고 굉장히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만으로 드라마 제작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학교 폭력, 성폭행, 마약 등 세계 각국의 청소년들이 노출될 수 있는 범죄 요소들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기에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는 느낌이기도 하고. 드라마의 교훈이나 재미 여부를 떠나서, 나의 경우에는 시즌 3부터 배우들에게 정이 들어서 마지막 시즌까지 완주했다. 왜, 그럴 때 있지 않나. 하루하루가 너무 순탄하고 평화로워서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때. 그때 보면 참 좋은 작품이라 생각한다. 매 에피소드마다 생각할 거리가 눈 오듯 쌓이거든. 아무튼... 혹시 매달 넷플릭스에 기부만 하고 있으시다면 이 작품 추천드리면서 이만 글 맺는다.
신박하다고 생각한 '루머의 루머의 루머' 트위터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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