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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Feb 26. 2021

이름 없는 불꽃들의 이야기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2월 초에 있던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났다. 한 달 내내 책으로만 뵈었던 안중근 의사를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는데, 회사 벽면에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는 그의 모습은 회사의 사연을 궁금하게 만들 정도였다.

한국일보

    집에 도착하여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더본로지스틱스 조종현 대표가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감명을 받고 2017년 벽화를 제작하였다고 한다. 조 대표는 고속도로를 오가며 이 벽화를 보는 아이들이 부모에게 벽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묻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길 바란다고 하였다.


    어쩌면 한 달 내리 한국사를 공부한 나보다 대표님이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공식처럼 외웠던 나의 십수 일보다 기념관을 방문한 대표님의 하루가 더욱 값졌으리라.


    시험을 준비하는 한 달 동안 가족보다 자주 얼굴을 뵌 최태성 선생님은 "역사에 무임승차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시험 점수를 매기는 것으로 한국사 공부를 끝낸다면 나는 한국사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사용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보기 시작한 게 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다. 이 작품으로 나의 한국사를 매듭지은 건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오."


    조선 최고 사대부의 영애가 밤에는 총을 든다면 어떨까. 의병으로 항쟁을 하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피를 물려받은 고애신은 여느 양반집 규수처럼 나비나 화초를 수놓으며 꽃처럼 살기를 거부한다. 다만 그녀는 자신을 불꽃이라 칭한다. 밤이 되면 양복 차림으로 총을 들고 지붕 위를 뛰어다니며 조선의 독립에 위협을 가하는 세력들을 처리한다. 그날도 똑같은 밤이었다. 자신이 노리던 저격 대상이 다른 누군가에게 먼저 총을 맞기 전까지는.


    자신의 선수를 가로챈 인물은 바로 유진 초이. 조선인의 외양을 한 미국 해병대 장교였다. 아홉 살 무렵 제 부모를 때려죽이던 주인집에서 도망 나와 연고도 없는 곳에서 숨어 지내다 미국인 선교사에게 짐처럼 떠맡겨져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도망치듯 도착한 미국에서의 삶도 조선보다 나은 편은 아니었다.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열심히 일해 번 돈을 빼앗기기도 했고, 아무 이유 없이 네 나라로 돌아가라며 구타당하기 일쑤였다. 멍하니 항구를 바라보다 파병에서 돌아온 미군 부대 속 흑인을 본 유진은 자신이 미국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을 깨닫고, 이후 동양계 최초 미 해병대 장교로 임관하게 된다.

이미 자신의 조국을 미국으로 삼은 유진에게 조선 발령은 죽은 부모의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였고, 부모를 때려죽인 주인집부터 시작해 조선 자체를 짓밟아 버리겠다는 마음과 함께 조선으로 향한다.


    유진이 조선에 자리를 잡을 무렵, 일본에서 애신의 정혼자가 10년 만에 귀국한다. 김희성이었다.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지 않던 이가 무슨 이유에선지 조선으로 돌아오지만,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유진의 부모를 죽인 주인 나으리가 바로 희성의 조부였고, 그 이유로 희성의 집안이 유진에게 위협받고 있었기 때문.

애신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희고 말랑한 약골의 사내." 희성을 묘사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자신이 혼기를 훌쩍 넘기고 나서야 돌아온 정혼자가 걱정했던 그대로의 사내였다는 사실에 탐탁지 않은 애신은 희성과의 혼인을 깨려 하지만, 애신을 처음 보자마자 늦게 귀국한 것을 후회할 정도로 희성은 애신을 마음에 품게 된다.


    유진과 희성이 묵는 호텔 글로리의 사장 쿠도 히나는 일본인과 혼인한 조선의 여인이었다. 우아한 기품에 화려한 빈관은 부유한 그녀의 삶을 보여주는 척도였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감추고 싶은 흠은 있는 법. 자신이 친일파 이완익의 여식이라는 사실은 그녀를 옭아매는 사슬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이완익을 매국노라 욕할 때면 몰래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었다. "울기보다 물기를 택하렴." 여급에게 건넨 이 한 마디가 히나가 그동안 살아온 인생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런 그녀를 받쳐 주는 사내 구동매는 백정의 자식으로 어릴 때부터 천대받기 일쑤였다. 더 이상 백정으로 살 수 없었던 동매는 일본으로 건너가 칼을 잡았고, '이시다 쇼'라는 이름과 함께 무신회의 한성지부장으로 조선에 돌아오게 된다. 그도 유진과 같은 마음이었을까. 귀국하자마자 자신과 자신의 부모를 욕보였던 사람들에게 보란 듯 복수를 하는 모습은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기 충분했다.


    드라마를 보며 관전해야 할 점은 애신으로 인한 유진과 희성의 변화다. 조선의 주권이 어느 쪽에 있든 상관없던 유진이 애신의 의병 운동을 돕기 시작하고, 아름답고 무용한 것만을 좋아하던 희성은 그만의 방식으로 조선의 주권을 지키려 한다. 다소 거칠지만 애신을 향한 애정을 보이는 동매의 모습과 당시에는 흔히 볼 수 없었던 카리스마 있는 여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히나의 신들 또한 작품을 돋보이게 해 준다.



흠잡을 곳 없는 연기력과 연출력


    앞서 설명한 다섯 명의 인물만이 극을 이끌어 가지는 않는다. 극 중 인물들이 만들어 가는 거대한 흐름 속에 그들이 주가 되는 것일 뿐.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의병들의 이야기다. 그렇기에 애신과 유진의 애정신이 다른 작품들보다 훨씬 절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아련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또한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주제임에도 중간중간 들어가는 웃긴 장면으로써 이야기의 흐름이 완벽히 환기될 수 있었다.


    유난히 조연이 든든하게 잘 받쳐 주는 작품들이 있다. 뭣도 모르는 일개 대학생이지만, 미스터 션샤인은 그중에서도 가장 든든한 조연들을 갖추고 있는 것 같다. 김은숙 작가의 이전 작품 '도깨비'에서 김병철 배우와 조우진 배우가 비슷하게 생겼다며 헷갈려하던 사람들의 반응을 후작에서 개그 코드로 활용할 줄은 몰랐다. 반삭 머리 일본군 츠다를 연기한 이정현 배우와 모리 타카시를 연기한 김남희 배우의 연기력은 본인뿐만 아니라 모든 시청자들이 느꼈는지 이를 감탄하는 댓글들이 유튜브 영상 밑에 쭉 달려 있다. 곧 김남희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따라 '스위트 홈'을 볼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드라마 후반에는 본인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박정민 배우가 카메오로 나오기도 한다. 내 기준으로는 더할 나위 없는 출연진 라인업이었다. (다만 김태리 배우와 이병헌 배우의 나이차가 드라마 몰입에 훼방을 놓는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그것 하나는 정말 아쉬웠다.)


    가장 감명 깊게 보았던 장면을 뽑아야 한다면 고민 끝에 이 장면을 뽑겠다.

아래 장면은 고종의 환영일 뿐인데도 소름이 돋았었다. 이완익의 뒤로 펄럭이는 일장기와 궁 안까지 들어찬 일본군의 모습은 고종이 왕위에서 느꼈을 위협과 타국으로부터의 압력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했다. 그 당시 조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였는지도 느껴질 정도였다. 이러한 난국에서도 결국 주권을 되찾을 수 있었던 건 수많은 이름 없는 불꽃들, 의병과 독립운동가의 희생이 아니었을까.



역사 왜곡 논란; 고종은 어떤 임금이었나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들에는 항상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있다. 바로 역사 고증에 관한 이슈다. 미스터 션샤인도 역사 왜곡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나 보다. 본인은 드라마가 방영되고 2년이 지나서야 이 작품을 접했지만, 당시 역사 왜곡 논란이 일어 "역사를 왜곡하는 드라마와 영화들을 엄중히 처벌해 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올라왔다고 한다. 여러 가지 쟁점이 제시되었지만 본인의 눈에 띄었던 건 고종에 대한 것이었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고종은 조선을 타국으로부터 지켜내려는 의지가 굳건한 인물로 그려진다.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의병 항쟁을 지원하는 군주가 바로 드라마 속 고종이다. 현실도 이와 같았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 한국사를 공부하며 아쉬움을 느꼈던 부분은 고종이 왕권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고종이 후원하던 독립협회를 자신의 손으로 해산시킨 이유는 윤치호가 공화정을 세우려 한다는 밀서 때문이었다. 광무개혁에서도 자신을 황제라 칭하며 왕권을 강화하려 한다. 고종이 왕권에 대한 욕심을 조금이나마 내려놓고 독립협회를 계속 지원해 주었다면, 그리고 조선의 독립에 조금이라도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역사는 현재의 것과 다르게 기록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스터 션샤인은 감히 역작이라 말해 본다. 이름 없이 의병으로만 기록된 이들의 이야기를 가슴 벅차게 담아내었기 때문이다. 정주행을 끝낸 지 꼬박 보름이 지났어도 머리에 새겨진 애신의 대사가 있다.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오.
거사에 나갈 때마다 생각하오.
죽음의 무게에 대해.
그래서 정확히 쏘고 빨리 튀지. 봐서 알 텐데.
양복을 입고 얼굴을 가리면
우린 얼굴도 이름도 없이 오직 의병이오.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꼭 필요하오.
할아버님께는 잔인하나
그렇게 환하게 뜨거웠다가 지려 하오.
불꽃으로.
죽는 것은 두려우나 난 그리 선택했소.


    어쩌면 애신뿐만 아니라 의병 모두의 심정이 담긴 대사이지 않을까. 죽음 앞에 두렵지 않은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아무리 삶에 미련이 없다 하더라도 막상 죽음이 느껴지면 생각이 달라질 건 예상 가능하다. 의병들은 죽음이 예상되더라도 싸울 수밖에 없었다. 쪽수에 밀리고 무기에 밀려도 후퇴는 드물었다. 이기지 못 할 싸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적을 향해 달려 나가는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곧 있으면 3.1절이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일제의 탄압에 맞선 사람들도 분명 무서움에 떨었을 테다. 그러나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자리를 지켜주심에 감사드린다. 그들의 용기와 희생을 딛고, 지금 우리는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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