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부양하면서 겪었던 일과 생각을 두서없이 나열합니다.
투병의 시작은 암이었다.
한창 코로나로 병원 방문도 어려웠던 해에 아버지는 전립선암 판정을 받았고
우리 가족들은 확률을 얘기해 가며 그중에 제일 낫다느니 하며 고통의 순위를 확인하면서 불안감을 불식시켰고
동시에 매섭게 병원비를 검색해 나갔다.
사실 병원비가 가장 두려웠다.
계속되는 병원 방문과 혈액검사에 가장 쫄렸던 결과는 역시 전이 여부였다.
혈액이나 뼈만큼은 아니길 바랐고, 여기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쓸 수 있었던 만큼 전이는 없었다.
수술은 전립선 기관을 통째로 떼어버리는 것으로
병원에서 가능한 수술종류는 개복수술과 로봇팔 수술 두 가지였고
개복수술은 150만 원대였지만, 병원에서는 나이가 있으셔서 회복에 무리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비급여인 로봇팔 수술을 권했다. 약 800만 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술부위가 적은 만큼(칼로 째는 부위가 작다는 것) 회복에 용이하다는 것이었다.
지금 와서야 생각해 보니 회복이 더뎌서 오랫동안 입원하고
또 병원에 계속 통원하는 것도 결국 비용과 품이 들기 되기 때문에
총액으로는 따진다면 큰 차이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건강이 더 소모되므로)
이게 첫 번째 수술이었다.
이때의 수술비는 아버지가 그동안 모아 온 돈으로 해결했고, 이게 아버지의 전재산이었다.
입원비 및 부가적으로 들었던 돈은 작은언니와 내가 해결했다.
이 시기에 아버지와 대화한 것이 그동안 성인이 되면서 했던 대화 중에 가장 건설적이고 심도 있는 대화였는데,
우리 부모님은 자식들을 어리게만 보는 경향이 있어서 자신들의 자산을 공개하지도 않고
(30대인데 아직도 미취학 아동 취급.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당시 집의 월세를 내가 내고 있었다.)
그 외 공과금 같은 우리 집안의 돈이 어떻게 흐르는지 알리지 않아서
이때까지 평생 비공 개였던 것이 모두 공개되는 순간이었던 것이다!
이후 아버지가 매월 연금이 얼마나 나오며 우리 집에서 발생하는 고정지출들을 요목조목 알게 되었고
미래 계획을 같이 조율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내가 더 내야 하는 것이었지만.
이 모든 과정에 큰언니는 없었다.
이때는 작은언니가 제일 고생을 많이 하였는데,
아버지 입원 시 코로나라서 한 명의 보호자만 상주할 수 있었고, 교체가 안되었다.
그걸 작은언니가 담당했고
나는 중간중간 옷을 가져다주거나 간식을 조달하고 퇴근 후 병원 마감까지 말동무를 하러 방문하는 게 다였다.
그래도 우리는 큰 대학병원의 최측근이 입원한 경험 자체가 처음이라 조금은 흥미로워서 그랬는지
둘이서 그 안에서 재미를 찾아가면서 그 시간을 보냈었다.
지금 생각하면 밝게 장하게 잘 지냈던 것 같다.
수술은 신체를 재부팅하는 하는 과정이 있어서 그때 확 아버지의 신체 컨디션이 전체적으로 다운된 것이 체감되었다. 본인도 그게 느껴져서 '수술받지 말걸' 하는 후회하는 말을 가끔 하시는데
이것도 지금 시점에 회복되서야 하는 소리지 당시에는 아버지 본인도 잔뜩 긴장했었다.
그러니 그땐 그게 맞았다.
수술은 너무 잘되어서 지금은 장난으로 고양이랑 똑같이 중성화수술받았다는 농담까지 가능한 수준으로
암에 한해서는 회복되어 완치 판정을 받고 연단 위 간격으로 혈액검사만 받으신다.
수술 이후에도 회복 경과를 계속 추적관찰 해야 했는데, 아버지가 자꾸 병원에 거짓말을 해서 (담배 끊었다고)
거짓말 감시하려고 병원을 같이 다니다가 내 연차를 다 썼다. 개인적으로 제일 열받는 포인트다.
그리고 그땐 이게 시작이었는지 몰랐다.
내 소진된 연차를 기리며 치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