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팔라완, 스몰 라군 & 빅 라군에서...
케렌시아(Querencia)
투우장에서 투우사와 마지막 결투를 앞둔 소가 숨을 고르는 장소(피난처, 안식처)라는 스페인어 'Querencia'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과도한 경쟁 사회에서 나만의 휴식처가 필요한 현대인들에게 지친 삶에서 쌓인 몸과 마음의 피로, 스트레스를 풀며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공간 혹은 그러한 공간을 찾는 경향을 지칭하는 2018 대한민국 소비 트렌드 중 하나다...
[트렌드 코리아 2018] - 김난도 외 7명 저
필리핀 팔라완(Palawan) 섬의 엘 니도(El Nido)를 여행하면서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중 하나는 *엘 니도 호핑투어(Hopping Tour)다. 수많은 섬들이 모여있는 지역인 만큼 섬 하나하나마다 각자 아기자기한 매력이 있지만 너무 많아 다 가보기는 힘들다. 그래서 고르고 골라, 베스트 오브 베스트만 뽑아 종일 배로 이동하며 이 섬 저 섬 둘러보는 것이 바로 호핑투어! A, B, C, D코스별로 짜인 루트가 있지만 트래비(Travie) 매거진과 함께 필리핀 관광청이라는 막강한 권력을 등에 업은 우리 필리핀 원정대에게는 각 코스별 알짜배기를 혼합한 특별한 코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 특별한 코스의 첫 번째는 호핑투어의 꽃이자 끝이라 할 수 있는 *라군(Lagoon) 투어다.
내게 있어 라군이라고 하면 라오스(Laos) 방 비엥(Vang Vieng)의 블루 라군(Blue Lagoon)이 전부였다. 꽃보다 예쁜 세 남자, 뭉쳐야 뜨는 아저씨들, 여행으로 맞짱 뜨는 사람들 덕분에 한국사람 중 아직 그곳을 가보지 않은 사람은 있겠지만, 그곳을 모르는 사람은 이제 없을 것 같다. 그만큼 '라군'이라는 두 글자에는 '라오스 방비엥'이 강하게 박혀있었던 나였거늘,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 빼내듯 블루라군이 내 마음속 1순위에서 팅~! 튕겨져 나갔다. 데굴데굴 굴러들어 온 돌은 팔라완 엘 니도의 스몰 라군(Small Lagoon)과 빅 라군(Big Lagoon)이다.
스몰 라군 초입의 미니록 섬(Miniloc Island) 인근 바다. 이곳에 *방카선(Bangka Boat)이 정차하고 이제 카약으로 갈아탄다. 2인 1조로 스몰 라군 탐사대를 꾸린 우린 원정대는 그렇게 2조로 나누어 카약을 타고, 스몰 라군으로 향했다.
방카선 정차해있는 곳에서 스몰 라군 입구까지의 거리는 약 100m 정도. 얼른 가보고 싶은 마음에 혼자서 힘차게 노를 저어 보지만 카약은 엉뚱한 곳을 향한다. 수심이 얕은 바다 위로 뾰족 솟아 있는 바위들에 이리 쿵! 저리 쿵! 부딪히기를 몇 차례. 급기야 다른 카약과 충돌하는 사태까지 발생.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구령을 넣어 호흡을 맞춰 본다. 좌, 우로 한 번씩,
"하나, 둘. 하나, 둘."
이제야 제대로 간다. 리듬을 타면서 한껏 속도에 불은 붙은 우리는 앞서간 다른 조의 뒷모습을 타깃으로 삼아 열심히 노를 저었다. 그러자 어느새 스몰 라군 입구에 도착해있었다.
카약 1대만이 간신히 지나갈 듯한 아치형의 좁은 입구가 마치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비밀통로 같다. 그 좁은 문을 통해 카약이 한대씩 나가고 들어가고 한다. 먼저 연달아 2~3대가 나오면 다음엔 연달아 2~3대가 들어가고,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번갈아가면서. 이제 우리 차례다. 스무스하게 입구를 통과하려는데 툭! 툭! 카약 옆면에 약간의 상처를 입히며 통과했다. 뭐 어쨌든, 스몰 라군으로 입성!!!
입구를 완전히 통과해 안으로 들어오니 순간 귀가 먹먹해진 듯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여 작은 호가 생기면서 만들어진 스몰 라군은 한마디로 음소거된 세상이다. 노 젓는 소리, 카약이 물을 가르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세상의 모든 소리를 막아주는 기암절벽은 실제 우리가 사는 세상과 음소거된 세상을 분리시키는 일종의 결계 같다. 같은 하늘 아래 전혀 다른 세상이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떠들지 말라는 법도 없는데 왠지 속삭이듯 말하게 된다.
"노 잠깐 내려놓고 동영상 찍으세요~"
영상 담당인 팀원을 위해 잠시 노는 혼자서 젓는 걸로... 할까 했는데 그냥 나도 노를 내려놔버렸다. 고요하면서 아늑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사진으로 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노 젓는 물소리가 이 분위기를 방해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사진은 소리가 나는 부분을 틀어막고 최대한 조심스레 찍었다. 몇 장 찍고서는 카메라도 내려놨다. 카약은 그저 스몰 라군의 잔잔한 물결에 맡긴 채 지금의 이 평온함을 즐기고 싶었다.
촬영 삼매경에 빠진 사람과 분위기에 심취한 취객을 깨운 건 우리보다 한 발 앞서 도착한 다른 조 원정대원들.
"여기 보세요~"
(찰칵! ^^V)
"저희도 찍어 들릴게요!"
(찰칵! ^^*)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이좋게 서로의 추억 한 장씩을 남겨줬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돌아갈 시간. 세상과 단절된 듯한 분위기 때문인지 스몰 라군에 머물렀던 짧은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이 힐링된 것 같다. 바깥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고민, 걱정거리들이 해결되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잊고 있을 수 있는 행복했던 힐링 타임.
빅 라군으로 가기 위해 다시 방카선에 오른다. 카약 이상무! 필리핀 원정대 이상무! 방카 선원 이상무! 모든 점검도 마쳤겠다 이제 슬슬 시동을 켜고 출발할 준비를 하는데 연두색 카약 위에 빨간색 아이스박스, 둥글둥글 코코넛, 과자 한 바구니를 실은 수상 편의점(?) 아저씨가 접근해 온다. 연두색 카약이 바다색과 제법 잘 어울린다. 거기에 아저씨의 환한 미소는 덤. 하지만 환한 미소에 화답해줄 수 없어 미안할 뿐이다. 아저씨가 원하는 화답은 아니겠지만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찰칵! 환한 아저씨의 미소를 카메라에 담았다. 별 반응 없는 관광객에게도 끝까지 환한 미소를 잃지 않았던 아저씨의 밝고 따듯한 모습을 기억하며...
아저씨의 미소가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갈 때쯤 빅 라군 초입에 도착했다. 말 그대로 빅(Big)! 하다. 수심이 얕아 카약이나 스노클링, 다이빙을 즐길 수 있었던 스몰 라군과는 달리 빅 라군은 수심이 깊어 초입까지만 이런 액티비티가 가능하고 안쪽은 방카를 타고 관람해야 한단다. 그래서인지 스몰 라군보다 사람들이 적다. 카약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 몇 명이 있을 뿐. 그 사람들을 지나치자 에메랄드 빛 바다가 진푸른 빛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바다색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수심이 깊어짐을 알려준다. 이 뒤로는 액티비티를 즐기는 사람들은 만날 수 없다. 대신 웅장하고 탁 트인 절경과 만날 수 있다. 단단한 기암절벽을 뚫고 자라나 있는 나무들이 촘촘히 숲을 이루니 마치 거대한 브로콜리를 심어 놓은 것 같다. 바다 한구석에 딸려있는 *석호(라군)라기보다는 독자적인 하나의 큰 호수 같은 느낌이다. 이 두 자연의 모습이 어울려 신성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래서일까? 넓은 호수 중앙 아래에는 쇠도끼를 빠뜨리면 금도끼와 은도끼마저 선물해주실 신령님이 살고 계실 것만 같다. 물론 내가 정직하다면^^;;
빅 라군을 한 바퀴 크게 돌고 빠져나갈 무렵 가이드 제이크의 부연 설명이 이어진다. 빅 라군은 본디 바닷속에 잠겨있는 동굴이었다고 한다. 바닷속 땅 밑에서 형성된 석회석 동굴 지형이 융기되어 올라오면서 수면 위로 그 모습이 드러냈고, 천장이 내려앉으면서 지금처럼 하늘이 열린 기암절벽 지대가 된 것이다. 연간 0.13mm씩 상승했다고 하니 바다 밑에서 위로 올라오기까지 굉장히 오랜 세월이 걸렸으리라. 가히 세월이 빚어낸 비경이라 할 만하다. 지금도 융기(*자연적인 원인에 의해 어떤 지역의 땅덩어리가 주변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상승하는 일)가 진행되고 있다고 하니 어쩌면 수백 년 후, 지금과 또 다른 모습의 빅 라군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놀이 성지, 청춘여행의 대표 아이콘이었던 '라군'은 이제 나에게 신비롭고 위대한 대자연을 보며 힐링하는 케렌시아의 아이콘이다. 게다가 '라군'하면 가장 떠오르는 곳 역시 라오스 방 비엥이 아닌 필리핀 팔라완이 되었다. 물론, 막상 라오스에 가보면 또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모름지기 어디든 간에 내가 지금 있는 곳이 가장 좋은 법이니까!
본 원정대 여행은 여행 매거진 트래비(Travie)와 함께 필리핀관광청의 초청을 받아 다녀왔습니다.
보다 재미있고 생생한 팔라완 여행기는 트래비 4월호에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트래비 홈페이지에서 온라인 기사로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http://www.travie.com/)
< Travel Note >
*엘 니도 호핑투어(El Nido Hopping Tour)
A코스 : 스몰 라군(Small Lagoon)-빅 라군(Big Lagoon)-시크릿 라군(Secret Lagoon)-시미즈 아일랜드(Shimizu Island)-7 코맨도 비치(7 Commando Beach)
가격 : 1,200 PHP (점심 포함)
소요시간 : 약 7시간
B코스 : 스네이크 아일랜드(Snake Island)-피낙부유탄 아일랜드(Pinagbuyutan Island)-엔탈룰라 비치(Entalula Beach)-쿠도그넌 케이브(Cudugnon Cave)-스노클링 사이트(Snorkeling Site)
가격 : 1,300 PHP (점심 포함)
소요시간 : 약 7시간
C코스 : 헬리콥터 아일랜드(Helicopter Island)-마틴록 샤린(Matinloc Shrine)-시크릿 비치(Secret Beach)-스타 비치(Star Beach)-히든 비치(Hidden Beach)
가격 : 1,400 PHP (점심 포함)
소요시간 : 약 7시간
D코스 : 이필 비치(Ipil Beach)-카들라오 라군-(Cadlao Lagoon)파라다이스 비치(Paradise Beach)-파산디간 비치(Pasandigan Beach)-낫낫 비치(Natnat Beach)-부칼 비치(Bukal Beach)
가격 : 1,200 PHP (점심 포함)
소요시간 : 약 7시간
문의 : https://www.elnidoparadise.com, +63 949-132-8952, +63 995-322-1693
*라군(Lagoon), 석호
라군은 사주나 사취의 발달로 바다와 격리된 호수로서, 지하를 통해서 바닷물이 섞여 드는 일이 많아 염분 농도가 높고, 담수호에 비해 플랑크톤이 풍부하다. 조류가 운반해온 모래와 암석 쇄설물들이 만의 입구에 쌓여 만을 바다에서 분리하면 만은 라군(석호)이 된다. 이러한 퇴적물이 점점 많이 쌓이고 갈대 등이 자라면 라군(석호)은 결국 육지가 된다.
*방카선(Bangka Boat)
필리핀의 전통적인 배로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엘니도에서 자가용처럼 흔하게 사용되는 교통수단이다. 고기잡이를 할 때 쓰이기도 하고, 관광객들의 호핑투어에도 이용된다.
참조 : 엘 니도 리조트 홈페이지, 위키백과
[ Appendix : 호핑투어가 남기고 간 것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