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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볼러 Apr 16. 2019

폴란드인들의 용기를 증명하다, 바르샤바 봉기

우리는 자유로워지기를 원했고, 이 자유를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았다

1944년 8월 1일. 바르샤바 시민들은 일제히 거리로 나섰다. 고결한 자유와 독립을 위한 순결한 몸부림이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역사는 그 사건을, 그리고 사건 속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를 원했던, 치열했던 63일간의 슬프고도 감동적인 드라마가 있는 곳,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Muzeum Powstania Warszawskiego)이다.




"덜커덩!"


호스텔 현관문이 열린다. 오늘 하루 꽉 찬 여행으로 파김치가 된 몸을 이끌고, 아니 질질 끌고 방으로 들어간다. 아직은 이른 초저녁이라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나와 같은 라인 1층 침대를 쓰는 이탈리아 친구가 나를 맞아준다.


"안녕! 오늘은 일찍 왔네?"

"응, 아침 일찍부터 종일 안 쉬고 돌아다녔더니 좀 피곤해서."


씻기가 귀찮아 일단 침대에 앉아 노트북을 켠다. 내일이면 이제 폴란드 여행 마지막 날이다. 마지막 날인데 뭘 할까...? 내게 남은 시간은 하루, 그런데 가볼 만한 곳은 널렸다. 내 안에 선택 장애가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쉽지 않기에 더 깊이 빠지기 전에 이탈리아 친구의 도움을 요청했다.


"나 내일이 여행 마지막 날인데, 너라면 어디를 가겠니? 추천 좀 해줘~ 너 여행 가이드자나."

"음...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 갔었니? 난 오늘 거기 갔었는데 굉장히 특별한 경험이었어. 중요한 역사를 다룬 곳이라 거긴 꼭 가봐야 해."


바르샤바 봉기*. 폴란드에 대해 미리 공부하고 오지 않은 사람도 여행을 하다 보면 적어도 한 번쯤은 듣게 될 만큼 폴란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 그렇다면, 너로 정했다! 현직 여행 가이드의 추천이니 틀림없겠지.


바르샤바 봉기(Powstanie Warszawskie), 1944

바르샤바 봉기는 제2차 세계대전 시 1939년부터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있던 독일 군대에 저항하여 폴란드의 국내군(Armia Krajowa)에 의해 조직되었다. 8월 1일 발발한 바르샤바 봉기는 봉기군의 무장이 매우 변변치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63일이나 계속되어 1944년 10월 3일까지 지속되었다. 바르샤바 봉기는 폴란드인들의 용기의 증명이었으며, 서방의 국가들이 독일에 의해 점령된 폴란드의 비극적인 운명을 잊지 않도록 하였다.

※참조: 위키백과, 폴란드 대사관 웹사이트




다음날, 폴란드 여행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 입구는 단체로 견학 온 폴란드 학생들로 북적인다. 이곳, 이 역사가 폴란드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지가 느껴진다. 들어가려면 제법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일단은 박물관 주변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Muzeum Powstania Warszawskiego)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 정문
이른 아침부터 북적북적


박물관 뒤쪽에 자유의 공원(Park Wolności)이라는 작은 공원이 있다. 공원 중앙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조형물이 하나 있고, 그 옆엔 봉기 당시 바르샤바를 누볐을 장갑차가 세워져 있다. 하지만 이 둘을 제치고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것은 대리석 장벽이다. 마치 베를린 장벽처럼 길게 세워져 있다. 가까이 다가가니 전면이 빼곡하게 글자들로 새겨져 있다. 폴란드어는 모르지만 분명 사람 이름이다. 아마 바르샤바 봉기 희생자들의 이름이지 싶다. 벽 중간쯤에 노래방 책자처럼 생긴 책이 펼쳐져 있다. 한 명 한 명의 이름이 새겨진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이곳을 찾은 유족들이 이 빳빳하고 두꺼운 책을 뒤적거리며 고인의 이름을 찾고, 그 앞에 서서 기도 드릴 모습이 눈에 훤하다.

바르샤바 봉기군들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벽
추모벽의 지도라 할 수 있는 명부
바르샤바 지역 총지휘관 안토니 흐루셸( Antoni Chruściel)을 추모하기 위한 'Monter Bell', 몬테르(Monter)는 군 장교로서 그의 코드명이다
조형물의 정체는 바르샤바 봉기 때 파괴된 폴란드 왕자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Jozef Antoni Poniatowski) 동상의 파편이다
바르샤바 봉기군이 사용했던 급조 전투차량 Kubuś


추모벽 뒤로 담장을 따라 아담한 정원이 하나 나온다. 장미정원(Rose Garden)이란다. 야외 갤러리가 함께 있다. 아직 꽃피는 봄이 오기 전이라 장미정원이라는 이름이 무색하리만큼 황량하지만 그렇기에 바르샤바 봉기가 가진 어둡고 슬픈 분위기가 더 깊이 와 닿는 것 같다.

장미정원의 미술의 벽(Wall of Art)


담장에 그려진 그래픽 아티스트들의 작품들은 익살스러우면서도 무게가 있다. 친근하고 재미있는 그림으로 나치 독일의 뼈를 때린다. 만약 나치 독일의 수장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살아생전 이 그림들을 봤다면 아마 뼈도 못 추렸을 것이다.

바르샤바 여전사들 (też walczyliśmy -우리도 싸웠다!) / 나치 독일 풍자를 곁들여 바르샤바 봉기를 재미있게 표현한 카툰


담장 맞은편 벽에는 바르샤바 봉기 당시 실제 사진들이 시간 순으로 전시되어있다. 비밀리에 봉기군이 결성되어 준비하는 과정, 그리고 마침내 봉기한 바르샤바 시민들, 실패 후 폐허가 된 바르샤바의 모습까지. 긴장감 넘치는 한 편의 영화를 스틸컷으로 보는 느낌이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건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진 속 봉기군들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져 있다는 것. 반드시 봉기에 성공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유와 독립을 찾을 수 있다는 굳은 믿음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분명 웃는 얼굴을 보고 있는데, 눈가는 촉촉해진다.

봉기를 준비하는 모습
바르샤바 시민들이 마침내 일어섰다!
치열하고 긴박했던 전투
그럼에도 미소를 잃지 않은 봉기군들
그 중 유난히도 밝았던 여자아이의 함박미소에 눈물이 핑~~~ㅠㅜ
봉기가 남기고 간 처참한 흔적 #1
봉기가 남기고 간 처참한 흔적 #2


자유의 공원과 장미정원을 둘러보는 사이 어느덧 매표소가 한산해졌다. 이제 박물관 안으로 들어간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입구 위에 바르샤바 봉기의 정당성을 잘 나타내는 문구가 보인다.


우리는 자유로워지기를 원했고,
이 자유를 누구에게도 빚지지 않았다.


Jan Stanisław Jankowski | 정부대표단


말 그대로 그들은 자유를 원했을 뿐이고, 그토록 원하는 그 자유는 다른 어떤 누구에게도 빚진 것이 아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의한 피해였으며, 나치 독일에 의한 강제 수탈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정당하게 자유를 원하고 찾을 권리가 마땅했다. 바르샤바 시민들은 아마 이런 마음으로 봉기를 일으키지 않았을까? 본격적인 관람을 하기 전 입구에서, 나도 그들의 마음가짐을 마음에 새겨본다.




'따르르르릉~'

'솰라솰라솰라솰라솰라~~'


전화기 너머로 생존자의 육성이 들린다. 알아들을 수 없는 폴란드어가 머리에는 와 닿지 않지만 가슴에는 와 닿는다. 처참했을 당시 상황과 몹시도 불안하고 두려웠을 생존자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바르샤바 봉기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공중전화 부스
아마 당시 바르샤바 거리에선 이런 풍경이 익숙했을 것이다


'쿠웅~! 쿠왕~! 퍼엉~!'


이번엔 포탄 소리다. 벽에 있는 총알구멍에 귀를 갖다 대니 긴박했던 전투의 현장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여기저기서 포탄이 날아와 바르샤바 시내를 덮치고 건물들은 모래성처럼 휘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빛발 치는 포탄과 총알에 사람들은 혼비백산 몸을 피했을 것이다. 봉기군은 이런 열세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남아있는 시민들을 지키면서 바르샤바를 되찾기 위해 몸을 던졌을 것이다.

총알구멍에 귀를 갖다대면 사방팔방으로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함정에 속지 말자! 폴란드군 초소 같지만 알고 보면 독일군 초소였다고...
봉기 군들의 군복과 애마, 내 눈엔 환하게 빛나는 B사 엠블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창고형 마트처럼 생긴 넓고 큰 전시실에 커다란 비행기 한대가 천장에 매달려 안 보이려야 안 보일 수 없다. 'B-24J'라는 이 폭격기는 당시 봉기군의 막강 화력을 담당했다고 한다. 비록 복제된 모형이지만 크기만큼은 진짜다. 압도적인 크기에 위압감이 든다. 폭격기가 머리 위로 뜨면 그 아래 육지는 쑥대밭이 되었을 텐데... 이렇게나 무시무시한 비행기를 아이들은 그저 장난감 비행기 보듯 신기해하며 인증샷 찍는데 여념이 없다. 

봉기 박물관의 최고 인기스타 B-24J 폭격기, 여기 2층 난간이 베스트 포토존!


폭격기 뒤,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곳으로 향한다. 'MIASTO RUIN(폐허의 도시)'이라는 제목의 3D 영상 상영관이다. 최소 인원이 대기하고 있어야 입장이 가능하단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전부 고개 숙여 바닥을 쳐다보고 있다. 바닥에서 바르샤바 봉기 관련 영상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봉기 박물관은 둘러보면 볼수록 음향이나 영상을 활용한 전시들이 참 잘되어 있는 것 같다. 종종 자막이 폴란드어라는 것만 빼면.ㅠㅜ

그러는 사이, 어느덧 입장이 시작됐다. 상영관은 우리나라 대학로에 있는 소극장 비슷하다. 다만 무대가 아닌 스크린이 있다. 사람들이 자리에 앉자 곧 영상이 시작된다. 비행기를 타고 있는 1인칭 시점에서 폐허가 된 바르샤바 상공을 비행한다. 요즘으로 치면 드론으로 찍은 영상이겠다. 마치 내가 영상 속 바르샤바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실감 난다. 도시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어 끔찍하고 참혹한 모습에 소름이 돋는다. 10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영상이지만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을 것 같다.

맨홀 뚜껑과 포탄이 널부러져 있고, 건물은 형체를 전혀 알아 볼 수가 없다




매년 8월 1일, 오후 5시. 바르샤바에 사이렌이 울린다고 한다. 이때 바르샤바는 1분 동안 정지된 도시가 된다고 한다. 폴란드가 바르샤바 봉기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방법이다.


폴란드의 바르샤바 봉기라는 역사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우리나라 3.1 운동이 떠올랐다. 무장과 비무장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둘 다 원했던 것은 조국의 자유와 독립이었고, 둘 다 결과는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끝까지 저항했다.

올해, 20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았다. 그리고 작년, 2018년은 폴란드 독립 회복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시기도 비슷하다. 이런 역사적 유사성 때문인지 바르샤바 봉기가 남일 같지는 않다. 초, 중, 고 시절 국사를 공부하면서 느꼈던 분노와 안타까움의 감정들이 올라왔다. 어쩌면 흔히 형제의 나라라고 칭하는 터키보다도 더 형제에 가까운 나라는 폴란드가 아닐까?


폴란드를 떠나기 전,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에 오게 되어 정말 다행이다.


< Travel Info >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Muzeum Powstania Warszawskiego)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은 2004년, 바르샤바 봉기 60주년을 기념하여 개관되었다. 박물관은 폴란드의 자유와 수도 바르샤바를 위해 싸우고, 그 안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념하기 위한 장소이다. 역사를 가르치고, 감정을 북돋우며, 과거를 회상하게 하고, 관람객을 감동시키는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의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은 20세기 초의 전차 전기 공급소 자리에 세워졌는데, 볼라(Wola) 지역의 프쉬오코포바 거리(ul. Przyokopowa)와 그쥐보프스카 거리(ul. Grzybowska) 갈림길에 있다.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은 봉기 63일 동안의 영웅적인 싸움만을 보여주는 장소는 아니다. 당시 일반 시민들의 삶 또한 박물관을 통해 들여다볼 수 있다. 박물관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파괴된 도시의 잔해로 만들어진 석회암으로 된 도로를 걷게 되는데 ‘W’의 시간 (봉기의 시작 시간)을 체험하고, 오래된 인쇄기를 통해 포스터를 인쇄하기도 하고, 수로를 통해 걷기도 하고, 팔라디움 극장에서 봉기의 영상 기록을 볼 수도 있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실물 크기로 복제된 전투기 Liberator B-24J이다. 바르샤바 봉기 박물관은 방문하는 모든 이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주소 : Grzybowska 79, 00-844 Warszawa
지하철 : Rondo Daszyńskiego
버스 : Muzeum Powstania Warszawskiego: 102, 105
트램 : Muzeum Powstania Warszawskiego: 1, 22, 24
Opening hours: 월, 수, 금(08am~18pm) / 목(08am~20pm) / 토, 일(10am~18pm)
Closed: 매주 화요일, 1월 1일(The New Year), 2월 6일(Three Kings), Easter, Corpus Christi, 11월 1일(All Saints Day), 12월 24일~25일(Christmas Days)
티켓: 싱글 25 PLN / 할인 20 PLN / 단체 15 PLN(1인당) / 일요일 무료 / 오디오 가이드 10 PLN
Web/e-mail: http://www.pkin.pl/eng / informacja@pkin.pl
Tel. +48 22 539 79 05


바르샤바 봉기(Powstanie Warszawskie)의 약자인 P와 W를 상징한다

참조 : 주한 폴란드 대사관, Google Maps,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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