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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후, 1년 3개월

퇴사 일기 - 내 생애 가장 값진 시간

by 트래볼러

입사할 때는 몰랐다. 입사만큼이나 퇴사도 어렵다는 걸. 특히나 아무런 대책도 없이하는 퇴사라면...


나는 5년간 다닌 직장을 그렇게 퇴사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냥, 정말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싶어서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대학교 4년.

16년 동안 학교라는 곳을 다니면서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하는지는 대한 고민이나 생각을 진지하게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나 자신도 몰랐다.

처음에는 이게 퇴사를 망설이게 한 이유였지만 결과적으로 퇴사를 결정지은 첫 번째 이유가 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정말로, 진지하게, 열정을 다해 찾아보고 싶었다. 그래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고민을 사춘기 시절 혹은 늦어도 대학이나 군대에 갔을 때 한다고 하는데, 나는 예비군 훈련도 다 끝나서 민방위 편입을 앞두고 있는 31살 겨울, 거의 32살이나 다름없는 나이가 돼서야 하게 되었다.

늦은 나이 역시 처음에는 망설임의 이유였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결국에는 퇴사를 결정지은 두 번째 이유가 되었다. 내게는 다행스럽게도 요즘 사회초년생 남자의 나이가 옛날에 비해 많이 늦춰져 있었다. 33살의 신입사원도 있는 만큼 31.9살인 나는 그들과 비교하면 아직 1년 정도는 여유가 있었다. 어쩌면 지금이 내 삶의 변화를 위한 막차를 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차를 탈까? 말까?..... 고민 끝에 난 막차에 몸을 실었다.


2015년 12월, 퇴사를 했다.




퇴사와 동시에 실패라는 쓴 맛을 보았다.

퇴사 직후 영어마을에서 진행하는 워킹홀리데이 프로그램에 지원했다. 영어에 대한 갈증은 항상 가지고 있었기에 이 기회에 집중적으로 배우고 싶었다. 주 타깃이 대학생들이라 지원서의 나이를 쓰면서 약간의 민망함이 있었지만 당당하게 서류에 합격! 면접까지 봤다. 하지만 최종 결과는 탈락이었다. 역시 걸림돌은 나이였다.

퇴사 후 첫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퇴사 결정이 경솔했던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들면서 불안해졌다. 의기소침하게 무료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나에게 여자 친구가 함께 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퇴사 후 여행은 정석적인 코스니까. 이 여행으로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영어공부 계획을 세웠다. 영어마을의 대안으로 학원과 스터디 동호회 모임을 이용했다. 영어공부를 하면서 나머지 시간에는 하고 싶은 일 찾기에 집중했다. 진로나 꿈 관련 책들도 읽어보고, 진로 적성검사도 받고, 마인드맵을 그려보는 등 아는 방법을 총동원했다. 하지만 사실, 이미 학창 시절 다 해봤던 것들이었다. 이런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찾기 어려웠다. 보다 적극적인 방법을 모색하던 중, 닉 소프가 쓴 '나는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했다(지루하고 지친 삶을 극복하는 52가지 프로젝트)'라는 책에서 영감을 얻었다. 아주 작은 것,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에 문득 떠오른 것은 일기였다. 그날부터 매일 일기를 썼다. 물론 일기를 쓴다고 당장에 내 삶에 큰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다. 책의 저자가 말한 대로 그저 작은 변화를 주는데 의의를 두었다. 한동안은 이렇게 영어 공부하고, 매일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씩 해가고, 자기 전 일기를 쓰는 일상을 보냈다. 뚜렷한 변화나 진전은 없었다.


그렇게 한 3개월쯤 지났을까? 여느 때처럼 책을 읽고 있었다. 해외여행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는 평소 여행 수필을 즐겨 읽었다. 여행지에 대한 정보, 새로운 문화를 배울 수 있고 무엇보다 좋은 것은 여행에 대한 대리만족. 마치 지금 여행을 하고 있는 것처럼 여행의 느낌을 작가의 감성을 통해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순간적으로 세 가지 단어가 동시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여행, 일기(글쓰기), 책


여행과 책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었고 일기, 글쓰기는 좋아한다고까지는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매일 회사에 출근하는 것만큼 싫은 건 아니었다. 즐기는 않았어도 막상 쓰면 열심히 썼다. 매일 일기를 쓴 것만 봐도 분명 글쓰기를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이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직업, 일과 연관 지어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았다. 답은 내 손에 들고 있는 책에 있었다.


여행작가


2016년 5월, 드디어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




여행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를 땐 역시 인터넷이 최고다! '여행작가'라는 검색어만 쳤을 뿐인데 책, 잡지, 아카데미 등 다양한 결과가 나왔다.

단연 눈에 들어온 것은 아카데미다. 생각보다 많은 기관에서 학기제로 여행작가와 관련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당장 지원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새 학기를 기다려야 했다.

퇴사 후 1분 1초가 더욱 소중해진 나는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일단 여행작가와 관련된 책으로 독학을 했다. 여행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전반적인 개요를 파악하고, 이론까지는 아니지만 글쓰기, 사진 찍기 등 여행 콘텐츠 제작에 필요한 꿀팁들을 얻었다.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직접 글을 써보는 것이 가장 좋은 공부였다. 평소 여행 관련 수필이 자주 올라오는 브런치가 생각났다. 남들이 쓴 글을 읽기만 했었는데 이제는 내가 쓴 글을 직접 올려 다른 사람들과 내 이야기를 공유하고 공감하고 싶었다. 어떻게 보면 이 활동 자체도 여행작가로서의 활동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 연습도 하고, 여행 콘텐츠 제작 실전 트레이닝도 하고, 사람들과 내 여행을 공감할 수 있고, 아마추어 여행작가로서 활동할 수 있고.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바로 브런치 작가 신청을 클릭했다. 처음에 방법을 잘 몰라 탈락의 고배를 한 번 마셨지만, 두 번째 만에! 브런치 작가가 되었다.


2016년 6월, 브런치 작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브런치에는 그동안 다녀왔던 나의 여행들을 꾸준히 풀어냈다. 여행을 하면서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에 대해서 최대한 솔직하게 썼다. 몇 편을 글을 발행하고 나니 조금씩 글이 정리가 되고 나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어느 순간 모든 글이 비슷비슷해지고 너무 새로운 시도를 하려고 욕심을 부린 나머지 앞뒤 안 맞는 글이 돼버리는 것 같았다. 무조건 많이 쓴다고 해결될 문제만은 아니었다. 멘토라던가 혹은 전문적인 교육에 대한 필요성이 느껴졌다. 잠시 잊고 있었던 아카데미가 생각났다. 때마침 곧 시작되는 학기가 있었다. 2016년도 가을학기. 들뜬 마음으로 수강신청을 하기 위해 통장을 확인하는 순간, 들떴던 내 마음은 날개 잃은 새처럼 추락했다...


퇴사 후 나는 줄곧 퇴직금으로 살아왔다. 대책 없이 나왔어도 경제적인 부분에는 나름대로 최소한의 계획을 세웠다. 한 달 생활비를 정해놓고 그 안에서 생활했다. 그러면 퇴직금으로 약 6개월에서 길게는 8개월까지 수입이 없어도 생활이 가능했다.

사실은 이 기간이 내가 정해놓은 마지노선이었다. 늦어도 8개월 후에는 반드시 결판을 내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하고 있거나 아니면 다시 원래 하던 일을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알람시계가 아니고서야 계획은 언제나 빗나가기 마련. 생각보다 늦게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된 바람에 뒤이은 본격적인 시도와 노력도 늦어졌다. 이렇게 제대로 시도도 못해보고 돌아가기는 싫었다. 이제라도 찾은 만큼 작은 성과라도 만들어봐야 성에 찰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과 돈이 더 필요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느냐 혹은 연장하느냐


퇴사 고민 이후 다시 한번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어렵게 퇴사했는데 이렇게 돌아가기에는 허무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갈 수 있을 때까지 더 가보기로 했다. 적어도 여행작가 교육은 수료해야겠다 결심했다.


가을 학기는 결국 포기했다. 다음 학기로 다시 타깃을 잡았다. 약 5개월 정도 더 기다려야 했다. 5개월 동안은 돈을 벌며 글을 쓰기로 했다. 대학시절 아르바이트 경험을 살려 대학병원에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낮에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퇴근 후에는 글쓰기에 집중했다.


2016년 7월, 꿈을 향한 후반전이 시작됐다.




일하고 글 쓰고, 일하고 글 쓰고. 반복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반복되는 일상이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일을 하기 전에는 떠오르는 생각이 있을 때마다 노트북을 켜서 바로바로 글을 썼는데 이제는 달랐다.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도 퇴근 후에는 가능하면 글을 써야 했다. 정말 눈물 한 방울만큼의 의무감이 반영되었을 뿐인데 점점 글 쓰는 일이 즐겁지 않아졌다. 아무래도, 슬럼프였다.


슬럼프를 극복하게 해 준 건 역시나 이번에도 여행이었다. 처음으로 가족끼리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퇴사하자마자 미리 항공과 숙박을 끊어 놓은 것이 신의 한 수였다. 타이밍이 이렇게 잘 맞을 줄은 그땐 몰랐다. 참 다행이었다. 슬럼프를 한방에 날려버렸다. 여행을 다녀왔으니 새로운 이야깃거리도 생겼겠다, 다시 심기일전! 일도 열심히 글도 열심히 썼다.


어느덧 그렇게 5개월이 지났다. 제법 쌀쌀한 가을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추운 겨울이 되었다. 아쉬운 한 해가 넘어갔다. 지난 5개월 동안 이 날만을 기다려왔다. 여행작가 교육과정이 새 학기를 시작했다. 접수기간을 확인하고는 아직 여유가 있어 이왕이면 월급날 후로 접수하기로 했다.


그리고 드디어 월급날! 여행작가 교육과정을 접수하기 위해 홈페이지에 입장한 순간 허탈함에 모든 의욕이 상실됐다. 선착순으로 이미 마감이 된 것이다. 나는 예비 7번. 행운의 7. 하지만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행운이라는 게 프로그램 담당자의 의견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모두 내 불찰이었다. 첫 번째 기회를 돈 때문에 포기해야 했는데 이번엔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쓸데없는 이유로 미뤘다가 기회를 놓쳤다. 그렇다면 또 다음 학기를 가야 하나? 그러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다시 한번 이 여정을 연장하는 건 내 주변 상황이 여의치 않았고 나 역시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 꼭 이번에 승부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런 결론도 내리리 못한 채 하염없이 애꿎은 '여행작가'라는 단어만 검색창에 계속 끄적거렸다. 이것이 내 간절한 기도처럼 들렸을까?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게 만드는 뉴스 기사를 발견했다.


예비 여행작가를 비롯해 여행을 사랑하는 분들의 많은 지원 바랍니다!


또 다른 기관에서 주최하는 여행작가 아카데미가 지금 예비 여행작가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됐다! 절대 놓치지 않기 위해 이번에는 신청부터 입금까지 모든 절차를 그 자리에서 즉시 마무리했다. 접수 완료!


2017년 2월, 본격적으로 여행작가의 세계로 입문했다.




4월인 현재, 여전히 여행작가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다. 4월이 종강이다. 예상했던 대로 나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물론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내 글이 갑자기 확 재밌어지고 좋아지고 있지는 않다. 애석하게도...

하지만 괜찮다. 여행작가 아카데미를 다닌 다는 건 나에게 단순히 글쓰기를 배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행작가를 위한 공식적인 첫걸음


이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다. 물론 여기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마침내 여행작가가 될 것이다. 그것만이 지금까지 보내온 '퇴사 후, 1년 3개월'을 내 인생에 있어 가장 값진 시간으로 기억될 수 있게 할 것이다.




각자의 삶에는 각자가 생각하는 현재 가장 중요한 일들이 있다. 2015년 겨울,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하고 싶은 일을 찾는 일이었다. 아직 이룬 것은 아니지만 이제 첫 발을 들여놓았으니 앞으로 꾸준히 잘 해나가는 일만 남았다. 이제는 다른 중요한 일도 챙길 때가 됐다.

내가 그리는 나의 미래에는 여행작가로서의 삶도 있지만 사랑하는 여자 친구와 함께하는 행복한 삶도 있다. 이를 위해서는 더 이상 여행작가에만 매진할 수는 없었다. 또 한 번 삶의 변화가 필요했다. 다시 안정된 직장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그럼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고? 물론, 그렇다. 다시 돌아간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안정된 수입을 낼 수 있는 일은 현재로서는 예전에 회사에서 했던 전공 관련 직종이 최선이다.

하지만 어떻게 더 좋은 회사로 이직할까? 어느 회사가 연봉이 더 높을까? 에만 고민했던 그때와는 다르다. 어떻게 하면 회사생활을 하면서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갈 수 있을까? 더 나아가서 내가 하고 싶은 일로써 어떻게 수입을 창출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서 가질 수 있을까? 에 대한 고민에 더 집중할 것이다. 여행작가라는 확고한 목표가 있기에 퇴근 후 멍하니 TV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보내지 않을 것이다. 일과 글쓰기를 병행하면서 전업 여행작가로 데뷔하는 기회가 찾아오는 그날을 위해 만발의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다시 돌아가는 마음이 후회스럽거나 무겁지는 않다. 오히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일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든다.


2017년 4월, 내일부터 다시 출근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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