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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볼러 Sep 21. 2020

그래서, 대체 추사체가 뭐냐고요

어쩌다 제주 추사관

지금의 제주는 누가 뭐래도 여행지이자 관광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농업기술이 부족한 데다 사람이 살기에도 척박해 모두가 기피하는 최악의 유배지였다고 한다. 먼바다에 있는 섬이었기에 가는 길이 험난해 막말로 가다가 객사하라는 의미도 있었다고...(ㅎㄷㄷ) 이처럼 무시무시한 의미가 숨겨져 있는 유배길을 뚫고 제주에 안착해 유배생활을 했던 조선의 학자가 있다. 9년이라는 유배기간 중 무려 8년 3개월 동안 꾸준히, 부단하게 노력하여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했다. 학자로서 금석학*의 대가이자 문인(작가), 예술가이기도 했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선생의 이야기다.


금석학(金石學) : 금속과 석재에 새겨진 글을 대상으로 언어와 문자를 연구하는 학문




#이보게들!  보고 가게

출장이라 쓰고 여행이라 읽을라 했건만, 여행이라 쓰고 출장이라 읽어야 할 만큼 일복이 터졌다. 평소 복이라곤 손톱에 낀 떼만큼도 없던 놈인데 왜 하필 제주 출장을 와서 터져버린 건지... 그리고 복과 운은 본래 비슷한 개념 아니었던가? 복은 터졌는데 운은 지지리도 없다며 투덜투덜, 다음 작업 현장으로 이동했다.


"아~ 추사관 근처네!"


함께 출장을 온 직장동료는 제주 하면 '추사 김정희'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하곤 했다. 평소 추사 김정희와 추사체에 관심이 있어 과거 제주 가족여행을 왔을 때에도 추사관을 찾았다고 했다. 부끄럽지만 난 추사 김정희를 전혀 알지 못했기에 직장동료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고 (요건 운이 좋게도) 말로만 들었던 그곳에 오게 된 것이다. 일하러!ㅡㅡ;;


"시간 되면 잠깐 들러볼래?"

"좋죠! 근데 될까요?ㅋㅋ"


말은 그렇게 했으면서도 내심 혹시나 싶은 일말의 기대는 있었기에 차에서 내려 그 어느 때보다 열정적인 걸음으로 일을 하러 나섰다. 그리고는 몇 발자국 걸었을까,


"쏴아아아아~~~~~"


다시 후다다닥 차로 돌아왔다. 7월부터 계속된 장마에 태풍까지 겹쳤던 8월, 제주의 하늘은 오락가락이었다. 날은 흐려도 오전 비예보는 없어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점점 미쳐가는 요즘 날씨를 입증하듯 예고 없이 갑자기 물폭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에고~ 오전은 텄다 텄어!"

"ㅋㅋ그러게요, 좀 사그라들 때까지 기다려야죠 뭐."

"어차피 비 와서 못하는데 추사관이나 구경 가자!"

"음... 그럴까요 그럼?ㅎㅎ"


그렇게 우린 근무 중 이탈, 아니 일탈을 감행했다. 아니 뭐, 어차피 바깥일인지라 비 와서 하지도 못하는데 차에서 기다리나 실내에서 기다리나 그게 그거 아닌가!? 하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추적추적 빗속을 헤집으며 추사관으로 가는 길, 멀리 유배지 초입에 보이는 추사 김정희 선생 동상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보게들! 날 보고 가게. 특히 너! 내 누군지 모르니?ㅡㅡ^"


제주 추사관(Memorial House of Chusa)
추사관 입구
지그재그로 되어 있는 계단의 의미: 유배지인 제주도까지 팔도를 굽이굽이 다녀야 했던 추사의 유배길을 상징한다. 계단을  따라가도 굽이굽이, 피해가도 굽이굽이, 어디로 가도 굽이굽이


#하얀 건 종이, 까만 건 글씨냐? 그림이냐?

입구에서 방문자 기록과 손 소독을 마치고 추사관 안으로 들어섰다. 추사관 안에는 추사 김정희(이하 추사) 선생이 살아생전 남겼던 현판 글씨, 편지 글씨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온통 텍스트 세상, 텍스트 천국. 하지만 나에겐 그냥 그림 세상, 그림 천국. 3획이 넘어가면 읽을 수 없는 수줍은 한자실력인지라 솔직히 뭐가 뭔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눈에 들어온 건 '세한도(歲寒圖)'.


"추사관이 세한도를 그대로 본떠서 만든 거래~"


처음 보는 세한도였지만 내가 아는 유일무이 추사 전문가였던 직장동료에게 추사관에 대해서는 몇 번 들었던 터라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었다. 정말 실제 추사관 건물과 똑같은 모양의 집이 누런 한지(?) 속에 들어가 있었다. 모퉁이에 있는 소나무의 디테일까지 빼다 박았다. 세한도와 추사관의 싱크로율은 관람을 마치고 나가서 다시 감탄해보기로 하고 다시 텍스트 천국으로~^^;;

추사관 내부
제주 추사관의 세한도는 당대 최고의 추사 연구자였던 후지츠카 치카시(1879~1948)가 1939년 복제하여 만든 한정본 100본 중 한 점, 진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충남 예산군에 있는 추사의 생가, 추사고택


#그래서, 대체 추사체가 뭐냐고요

드디어 만났다!

추사 김정희, 추사관. 여기저기 추사, 추사, 추사. '추사'가 안 들어간 곳이 없는 이곳을 있게 만든 장본인. '추사체'다. 추사는 평생 동안 글씨체가 변화해 왔는데 추사관에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나이대별 변화된 글씨체를 비교해 놓았다. 50대의 글씨, 60대의 글씨, 70대의 글씨, 그리고 생을 마감하기 직전의 글씨를 비교해서 보면 변화된 과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예에 조예가 전혀 없는 일반인으로서 비교해보자면, 50대의 정직했던 글자는 나이가 먹을수록 정직함은 옅어지는 것 같다. 끝을 휘날려 붓이 갈라진 질감이 느껴지는 글자체로 변해갔다고나 할까? 개인의 취향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정직하게 올곧은 글자보다는 흐트러진(그렇다고 마구 삐뚤빼뚤한 것은 아닌) 마지막 글자체가 더 멋스럽게 느껴졌다. 요즘 말로 하면 더 트렌디한 글자체.


"아니 그래서, 추사체가 대체 뭐냐고요~"

"어...(말. 잇. 못.) 개인적으로는 유시민 작가 설명이 가장 잘 이해되는 것 같아."


추사가 돌아가시기 3일 전 써주었다는 서울 봉은사 현판 '판전(板殿)' 글씨 아래 새하얀 벽을 스크린 삼아 '알쓸신잡 2 - 남제주 편', 그중 추사관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상이 틀어져 있다. 영상 속 유시민 작가님의 깔끔한 정리,


추사 선생의 글씨가 추사체예요 그냥.
특정한 형태가 있는 게 아니에요.


이와 더불어 건축과 미술 양식 중 하나인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에 빗대어 설명을 해주었다. 본래 예술 양식을 뭐라 딱 정의하기 어렵듯 추사체도 그렇다고. 결국 추사만이 구사했던 획과 형태가 있는 글이 다 추사체라고.

아하! 유레카(Eureka)!


추사체의 변화 과정
2층에서 바라본 추사관 내부, '판전(板殿)' 현판 아래 상영 중인 알쓴신잡2- 남제주 편
추사의 흉상


#그래도 사람이 사는 곳

추사는 순조 때 암행어사를 지냈다. 이때 정의에 불타 일을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안동 김 씨 세력에 눈밖에 났다. 추사에 의해 파직된 안동 김 씨 중 한 명이었던 김우명은 안동 김 씨 줄을 타고 다시 복귀해 사관원(오늘날 감찰부)이 되는데, 추사에 대한 앙심과 안동 김 씨 기득권 유지를 위해 10년도 더 된 윤상도 옥사 사건을 엮어 모함하여 추사는 물론 추사의 아버지까지 파직당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으로 추사는 제주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죄인 김정희를 대정현에 위리안치*하도록 하라."


*위리안치는 죄인이 거처하는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는 형벌로 주로 대역죄인과 같은 중죄인에게 내려졌다. 이 이야기만 듣고 상상했던 추사의 유배지는 삭막함과 답답함이 느껴지는, 말이 집이지 감옥의 독방 같은 곳일 줄 알았다. 하지만 실제로 본 유배지는 의외로 사람 살만했다.


"밥만 꼬박꼬박 잘 챙겨준다면야 저는 10년도 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허세 조금(?) 보태서 나는 정말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달랑 초가집 한 채 일 줄 알았던 집은 3채나 되었고, 마당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열어도 될 만큼 넓었다. 추사는 집 밖을 나갈 수 없었겠지만 바깥 손님들이 찾아오는 건 가능했으니 적어도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크지 않았을 것 같다. 실제로 유배기간 동안 교육자로서도 활동을 했는데 가르침을 받기 위해 찾아온 제자만 3,000명에 이른단다. 게다가 추사의 벗인 일지암 초의선사는 유배기간을 통틀어 세 차례 방문을 했는데 한 번은 6개월간 머물며 추사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고. 떨어져 있을 때도 늘 추사를 걱정하여 해마다 햇차도 보내주었다 하니 어디 외로울 틈이 있었겠으랴? 물론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허전함은 어쩔 수 없었겠지만.


이처럼 고립된 듯 완전히 고립되지는 않은 생활이라면 충분히 살만 하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는 이런 환경이 추사가 추사체를 완성시킬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었다. 고립되어 있기에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고 철저하게 고립되지는 않았기에 바깥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예술적인 영감 얻거나 감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지.


추사 김정희 유배지
위리안치(圍籬安置), 추사 유배지를 둘러싸고 있는 가시덤불
넓은 안마당, 이 정도면 뭐 풋살도 가능?^^;;
추사 유배지 전경
제자를 가르치고 있는 추사, 그리고 그의 영원한 벗 초의선사와의 만남




추사관과 유배지를 둘러보는 사이 좀처럼 멈추지 않을 것만 같던 물폭탄 세례가 잦아들었다.(나이스 타이밍!^^)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ㅠㅜ 그래도 갑자기 내려준 비 덕분에 잠깐이나마 출장이라 쓰고 여행이라 읽을 수 있었으니 만족.^^


유배지 집터 밖으로 나오니 작은 공원(혹은 뜰) 이 있었다. 곳곳에 세한도에 등장하는 소나무가 심어져 있고 잔디밭 중앙에는 비석같이 생긴 푯말들이 마치 고대 성지 같은 느낌으로 꽂혀있다. 푯말에는 추사와 관련된, 추사에 얽힌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읽어보며 추사를 기억했다. 출구로 나오는 길에 추사관으로 갈 때 멀리서 봤던 추사 동상과 마주쳤다.


"자네, 이제 내 누군지 알겠나!?"

'물론입니다. 슨생님.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신성한 성지 같았던 유배지 옆 공원
공원에 있는 추사 동상
세한도 속 한 장면 싱크로율 99.9% 인증!
어쩐지... 포스가 예사롭지 않더라니




< TRAVEL NOTE >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1786~1856)

조선 말기에 활동한 시(詩)ㆍ서(書)ㆍ화(畵)에 능했던 천부적 학자. 글씨를 잘 쓰기로 명망이 높아 우리나라 서예사를 통틀어 가장 추앙받는 서예가 중 한 사람이다. 1840년인 55세에는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 해에 동지부사(벼슬이름)로 임명되었으나 파직되고 제주도로 귀양을 떠나 대정현에 위리안치되어 9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유배지에서의 곤궁한 생활 가운데 계속 글과 작품을 썼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졸박청고(拙樸淸高: 필체가 서투른듯하면서도 맑고 고아하다)한 「추사체(秋史體)」다. 추사체는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 미의 표출로서, 거기에는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작품으로는 「세한도(歲寒圖)」가 대표적인데 절제된 필묵법과 경물의 생략과 의도적인 배치 등을 통해 결벽에 가까운 선비의 지조와 자신의 상황을 표현했다 평가되고 있다. 그 외 현전하고 있는 작품으로는 「모질도(耄耋圖)」·「부작란도(不作蘭圖)」 등이 특히 유명하다.


추사체 (秋史體)

추사 김정희의 서체. 추사라는 이름은 그의 호를 따서 만들어진 것이다. 추사체는 예서체에서 출발하고 있으면서 예서의 변형인 한대(漢代)의 예서체에 두고 이것을 해서와 행서에 응용하여 청조의 서예가들도 염원했던 이상적인 추사체를 이룩했다. 굵고 가늘기의 차이가 심한 필획과 각이 지고 비틀어진 듯하면서도 파격적인 조형미를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당시의 서체와 구별되는 개성이 강한 서체로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였다.


세한도 (歲寒圖) <국보 제180호>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유배 중일 때 제자인 우선 이상적(1804~1865)이 책을 보내준 데에 대한 보답으로 그려준 그림. 이 작품은 예서체로 쓴 '세한도'라는 표제와 소나무와 잣나무, 가옥 등으로 이루어진 간결한 화면 그리고 김정희의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메마르고 거친 필치로 표현된 화면에서 느껴지는 차갑고 황량한 분위기는 발문에 쓰여 있는
"날이 차가워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가 늘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는 구절과 잘 부합된다. 제주추사관의 세한도는 당대 최고의 추사 연구자였던 후지츠카 치카시(1879~1948)가 1939년 복제하여 만든 한정본 100점 가운데 한 점이다.


제주 추사관 (Hall of Chusa In Jeju)

제주 추사관은 조선 후기 대학자이자 예술가인 추사 김정희 선생의 삶과 학문, 예술세계를 기리기 위해 지난 2010년 5월 건립되었다. 제주추사관의 전신은 1984년 제주지역 예술인들과 제주사 연구자들의 노력으로 건립된 추사 유물전시관이다. 그러나 전시관이 낡은 데다 2007년 10월 추사유배지가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되면서 그 격에 걸맞게 재 건립되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새롭게 제주추사관을 완공하였다.
제주추사관은 추사 기념홀을 비롯해 3개의 전시실과 교육실, 수장고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부곡 문화재단, 추사동호회 등에서 기증해 주신 '예산 김정희 종가 유물 일괄', 추사 현판 글씨, 추사 편지 글씨, 추사 지인의 편지 글씨 등을 전시하고 있다.

[주소]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추사로 44(안성리 1661-1번지)

[이용시간]
 - 동절기 : 9AM-18PM (입장 마감: 17:30 PM)
 - 하절기 : 9AM-19PM (입장 마감: 18:30 PM)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 추석

[관람료] 무료
  
[정시 해설] 10AM, 11AM / 13PM, 14PM, 15PM, 16PM
  ※안내데스크(지하 1층), 사전예약(추사관 홈페이지, 전화)

[문의] 064 710 6801~4 / http://www.jeju.go.kr/chusa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 <사적 제487호>

추사 김정희 선생은 타고난 천품과 치열한 학예 연찬으로 서예사에서 뿐만 아니라 금석고증학, 경학, 불교, 회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19세기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석학이다.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는 김정희 선생이 55세가 되던 해에 윤상도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먼 유배길에 올라 약 9년간의 유배생활을 했던 곳으로 지난 2007년 10월 사적 제487호로 지정되었다. 추사 선생은 이곳에 8년 3개월 머물면서 부단한 노력과 성찰로 '법고창신(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하여 '추사체'라는 서예사에 빛나는 가장 큰 업적을 남겼으며, 그 유명한 '세한도'를 그려내었다.

[주소/이용시간/관람료] 추사관과 동일


※ 코로나 19 상황에 따라 임시휴관될 수 있으니 방문 전 홈페이지 및 전화 문의 통해서 확인 필요! (단, 추사 유배지는 실외로 코로나 19와 관계없이 관람 가능)


참고: 위키백과, 제주추사관,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천재상식백과 읽을거리, tvN알쓸신잡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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