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엔 왜 갔어? - Episode Ⅳ
바벨 대성당 입구에서 압둘라와 쌔미의 일행인 두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완전체가 된 터키 친구들은 지들끼리 터키 말로 뭐라 뭐라 하더니 이내 압둘라가 나를 소개했다.
“이쪽은 한국에서 온 의민. 여기는 이스마(Esma), 여기는 오스만(Osman)”
“안녕! 반가워!^^”
“안녕! 우리도 반가워!^^”
4명의 터키 친구들은 경영 학도였다. 교환 학생으로 폴란드 우쯔(Łódź)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방학을 맞이해 여행 중이었는데 처음에 폴란드 수도인 바르샤바에 갔다가 별로 볼 게 없는 것 같아 크라쿠프로 넘어왔단다.
“자, 일단은 우리 구시가지 쪽으로 이동할까?”
압둘라의 리드 하에 우리는 크라쿠프 중앙시장 광장(Rynek Główny)으로 출발했다.
크라쿠프 구시가지 광장 거리로 들어섰다. 크라쿠프 거리에는 큰 도넛 모양의 빵을 파는 리어카 노점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스마가 저 빵을 먹어 봤는지를 물었다. 안 먹어봤다고 하자 대뜸 빵을 사주겠다며 나를 노점상 앞으로 데리고 갔다.
“아니야, 괜찮아~ 곧 저녁 먹을 건데.”
“이 빵 터키에서도 많이 파는 빵이야. 너한테 꼭 맛 보여 주고 싶어서 그래.”
이게 뭐라고, 당황스러울 정도로 강경한 이스마의 의지를 도저히 꺾을 수 없을 것 같아 돈이라도 내가 내려고 주머니 속 잔돈들을 긁어모았다. 그런데 그마저 선수를 쳤다.
“내가 냈어.^^”
+한국 문화와 인증숏을 좋아하는, 이스마(Esma)
22살. 꽃다운 나이만큼이나 꽃처럼 선명한 이목구비를 가진 이스마는 과거 한양대학교에서 4개월간 공부한 적이 있어 한국어를 조금 할 줄 알았다.(유일하게 한국말로 티키타가가 가능한 친구였다.) 한국 문화를 좋아했는데 특히 이승기가 나온 드라마를 다 챙겨 볼 정도로 이승기 찐팬이었다.
이스마는 보통의 대학생들처럼 인증숏 찍기를 즐겼다. 나에게 여행하면서 찍은 수십 장의 사진들을 보여주었는데 모두 쌔미가 찍은 작품들이었다. 이 모습을 본 쌔미는 자기 사진보다 이스마 사진이 더 많다며 투덜거렸다.
이스마가 사준 이름 모를 길거리 빵의 맛은 담백하면서 고소했다. 우리나라 믹스 커피와 함께 하면 참 잘 어울릴 맛이었다. 맛은 심심해도 자꾸만 손이 가는 건빵처럼 자꾸만 입이 갔지만 저녁을 위해 반만 먹고 반은 남겨두었다.
중앙시장 광장에 도착해 저녁 메뉴를 고르려는데 서로의 취향을 몰라 본의 아니게 광장 한복판에서 열띤 회의가 시작됐다. 얘기가 길어지자 쌔미가 주머니에서 무언가 스윽 꺼내 들었다. 담배였다. 그런 쌔미를 보자 이스마는 적당히 피라며 걱정 같은 핀잔을 줬다. 저러다 싸우는 거 아닌가 조마조마했지만 압둘라가 말하길, 저 둘은 원래 저렇단다. 저래 놓고 이스마는 또 사진 찍어달라 할 거고, 쌔미도 군말 없이 잘 찍어줄 거라고. 티격태격하면서도 해달라는 건 다 해주는, 그야말로 정말 찐친이었다.
+뮤지션이자 애연가, 쌔미(Semih)
틈만 나면 담배를 꺼냈다. 틈만 나면 흥얼거렸다. 나이도 제일 어린것이.(실제 말로 꺼냈다면 완전 꼰대 소리 들었을 거다.^^;; 터키에도 꼰대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21살인 쌔미는 기타리스트였다. 직업은 아니고 취미로. 우리들 중 유일한 흡연자로 애연가였다. 이스마의 핀잔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담배를 피우곤 했다. 담배 피울 때마다 핀잔을 주는 이스마가 얄미울 법도 한데 이스마의 인증숏 요구를 다 들어줄 만큼 심성이 착했다. 게다가 정도 많았다. 한참 뒤의 일이지만 헤어지기 직전 나에게 자신의 애장품을 주었다. 기타리스트에게는 자신의 손가락과 같을 기타피크였다. 갑작스러운 애장품 공세에 나는 당장 아무거도 줄 게 없어 고마움과 미안함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몸 둘 바를 몰라 하자 그냥 자기가 주고 싶어 주는 거라며 답례는 괜찮으니 너무 마음 쓰지 말란다. 본래 눈물샘이 사하라 사막이라 겉으로는 못 울었지만 마음으로는 정말 태평양 바다 같은 눈물을 흘렸다.
우리의 저녁 메뉴는 ‘자피엔카’로 정해졌다. 잘 구운 바게트 빵 위에 각종 야채, 고기, 치즈 등 취향에 맞게 토핑을 얹어 먹는 폴란드 전통음식. 쉽게 말해 바게트 빵으로 만든 피자빵이다. 사실 한 끼 식사라기보다는 대충 한 끼 때우기 좋은 간식에 가까웠다. 솔직히 난 레스토랑에 가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었지만 돈 때문인지(어디까지나 내피셜이다.) 친구들이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마음 같아선 그런 거 걱정 말라며 내가 쿨하게 한턱 쏘고 싶었지만 나 역시 한낱 가난한 여행자인지라 쿨하게 자피엔카를 선택했다.
저녁을 먹은 후 크라쿠프 중앙시장 광장의 밤을 즐기다 터키 친구들의 숙소로 향했다. 숙소 로비에서 차 한잔하며 못다 핀 이야기꽃을 피워보기로 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압둘라는 물을 사야 한다며 마트에 들렀다. 큰 생수 2통을 사 오더니 무심하게(오다 주웠다 느낌으로) 1통을 나에게 건넸다.
“나 주는 거야? 나도 숙소에 물 있는데.”
“응, 알아. 그냥 주고 싶어서.”
+세계 화폐 수집가, 압둘라(Abdullah)
압둘라는 26살, 네 명의 친구들 중 가장 붙임성이 좋았다. 지그문트 종탑에서 나와 처음 말을 했던 친구이기도 하다. 함께 다니자는 제안도 먼저 해주어 덕분에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압둘라에게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었다. 어설프다 못해 안 쓰럽기까지 한 내 영어 농담에도 가장 성의 있는 리액션을 해주곤 했다. 내가 자기보다 어리게 보인다며 나의 외모를 부러워하기도 했다.(실제는 내가 7살이나 많았다는...^^;;) 그런 압둘라에게 난 나중에 나이 들면 넌 그대로고 나만 늙을 거라며, 원래 아시아 사람들은 늙으면 한방에 훅 간다는 말로 위로를 해주었다.
자정이 다 돼서야 우리는 헤어졌다. 밤새도 끝나지 않을 만큼 할 이야기는 여전히 많았지만 다음 날 아침 일찍 여행 스케줄이 있어 아쉽지만 이쯤에서 우리의 만남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폴란드 이후 나의 다음 여행지는 무조건 터키일 테니, 다음에는 이스탄불에서 만나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하고서는, 난생처음 해보는 어색한 서양식 인사(볼 키스)를 끝으로 친구들과는 작별을 했다.
아차, 생각해 보니 한 친구를 빼먹었다. 오스만(Osman). 딱 그런 친구였다. 조용하니 있는 듯 없는 듯 있는 친구.
+조용한 핸썸 청년, 오스만(Osman)
압둘라와는 대학 친구였고 다른 친구들과는 폴란드에 와서 만났다는 오스만은 잘 생긴 조용한 친구였다. 말수가 적고 다른 사람들이 이끄는 대로 잘 이끌려 주는 친구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본인 실속은 다 차렸다. 같이 걷다가 사진 찍고 싶은 것이 있으면 혼자 경로를 이탈해 찍고 오곤 했다. 그렇다 보니 종종 우리 시야에서 사라질 때가 있었다. 다 같이 사진을 찍을라 하면 꼭 저 멀리에서 뒤늦게 뛰어 오곤 했다. 숙소에서 이야기할 때도 갑자기 졸리다며 혼자 잠시 눈을 붙이기도 했다. 말수 적고 조용한 사람을 보통은 내성적이라고 표현하는데, 오스만은 내성적은 아니고 자기만의 세계가 확실한 친구였다.
터키 친구들과의 만남이 있었던 다음 날. 적어도 향후 1~2년 안에는 다시 보기 힘들 줄 알았던 친구들과 단 하루 만에 재회했다. 아우슈비츠 투어 시간이 겹쳐(친구들은 끝나는 시간, 나는 곧 시작할 시간) 잠깐 만날 수 있었다. 진짜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이제는 정말로 헤어질 생각을 하니 그냥 보내기 아쉬웠다. 이스마는 빵을, 압둘라는 생수를, 쌔미는 기타피크를, 오스만은... 추억을(?)^^;; 나만 이것저것 받은 것 같아 어떻게든 나도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가방을 열어 당장에 가진 내 살림살이를 뒤져보니 펜 한 자루와 노트, 그리고 한국 돈이 보였다. 옳거니! 손편지가 좋겠구나. 각자에게 손편지를 썼다. 세계 화폐를 수집하는 압둘라에게는 특별히 노트가 아닌 한국 돈 천 원짜리에 썼다. 손편지를 받은 친구들의 반응은? 또 날 감동시켰다.ㅠㅜ 아무래도 감동에 대한 보답을 또 하기 위해 훗날 친구들을 만나러 가야 할 것 같았다. 여전히 폴란드에 있다면 폴란드로, 터키로 돌아갔다면 터키로. 코시국이 끝난 후 나의 첫 여행은 아마 이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여행이 되지 않을까 싶다.
(2021년 현재, 이스마와 쌔미는 가끔, 아주 가끔 SNS로 연락을 하곤 한다. 압둘라와 오스만은... 잘들 살고 있니? 한국인이 자주 하는 거짓말 중 하나지만, 우리 언제 한번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