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바르샤바 별로래? - Episode Ⅱ
혼행을 하기 전의 나는 혼밥에 익숙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혼밥의 가장 쪼렙이라 할 수 있는 패스트푸드점조차 힘겨웠다. 누군가 나를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 마음 편히 햄버거 한입 베어 무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다. 햄버거 한 입에는 콜라 한 모금이 정석이지만 가능한 한 빨리 먹어 치워 이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얼른 탈출하고자 콜라는 뒷전에 두고 우격다짐으로(입속에선 아직 저작운동이 한창인데도)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를 계속 욱여넣곤 했다. 그러다 종종 사래도 들렸다. 잔뜩 남은 콜라는 남은 햄버거 마지막 조각과 함께 원샷으로 내 식도에 태워 내려보냈다. 코로 먹었는지 입으로 맡았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허겁지겁 먹었지만 다행히 배는 불렀다. 차마 소화되지 못한 햄버거와 프렌치프라이가 식도에서부터 위장까지 얹혀 있어 든든했고, 여전히 쌩쌩한 콜라의 탄산이 배를 빵빵하게 해 주었으니까.
그랬던 내가 혼행을 하면서 혼밥을 마스터해버렸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 닥치면 하게 되어 있다. 막상 혼밥에 익숙해지니 혼밥이 더 쉽고 편했다. 혼자라 웨이팅이 긴 맛집을 가도 금세 자리가 생겼고, 메뉴도 내 취향대로 고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누가 몇 개 먹었나, 벌써 다 먹은 건가 눈치게임을 하지 않아도 됐다.
바르샤바에서의 첫날, 숙소로 들어가는 길에 마음 쏙 드는 음식점을 하나 발견했다. 펍 분위기가 나는 레스토랑이었다. 빨간 배경에 하얀 글씨의 간판, 따듯함이 느껴지는 노을빛 감성조명, 빨간색과 흰색이 교차된 체크 식탁보,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메뉴가 내 취향을 저격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언제 한번 들러야지 찜해두었는데 그 이후 매번 늦게 숙소로 돌아오는 바람에 항상 가지 못했다.(대개 ‘언제 한번‘이라 하면 그 언제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이러다간 여행 중에 가지 못할 것 같았다. 어느덧 바르샤바에 머문 날이 머물 날보다 많아졌기 때문이다. ’언제 한번’이라는 말은 쏙 빼버리고 ‘시간 내서’라는 말을 집어넣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과감히 하루 저녁 일정을 이 레스토랑에 올인(All In) 하기로 했다.
공교롭게도 시간을 낸 날이 주말 저녁이었다. 평소 평일 저녁에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던 터라 아마도 웨이팅은 각오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아직은 조금 이른 저녁 시간이기에 혹시나 하는 기대를 안고 찾아갔다. 하지만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웨이팅이 입구 밖까지 삐져나와 있었다. 내가 맛집을 제대로 본 게 맞았다는 걸로 위안을 삼으며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창문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웃풍처럼 몸 구석구석을 파고드는 은근한 추위 속에서 오들오들 떨며 기다린 지 한 30분,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히 내민 직원이 인원 체크를 하기 시작했다.
“몇 분이세요?”
앞앞 팀은 4명, 앞 팀은 3명, 그다음이 나였다.
“혹시 1인석도 괜찮을까요? 구석진 자리라 조금 좁기는 한데...”
“저야 더 좋죠! 괜찮아요!^^”
이게 바로 혼밥의 장점 중 하나. 앞에 두 팀을 제치고 먼저 들어갔다. 안내를 따라 도착한 자리는 정말 좁았다. 테이블은 2인용이었지만 거의 앉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바깥쪽 의자는 치우고 벽 쪽 구석에 있는 의자만 두어 1인석으로 세팅되어 있었다. 생각보다도 더 좁은 자리에 살짝 당황은 했지만 막상 구석으로 들어가 앉으니 아늑하고 좋았다. 상다리 부러질 만큼 시킬 것도 아니니 테이블 크기도 딱 적당하지 싶었다.
가게 앞을 지날 때마다 바깥에 놓여 있는 메뉴판으로 대충 스캔을 해둔 덕에 주문하는데 딱히 고민이 필요 없었다. 폴란드에 왔으니 당연히 폴란드 음식을 먹어야 하므로, 폴란드 전통음식으로 시켰다. 우리나라의 족발과 93% 닮은꼴인 내 사랑 골론카(Golonka)를 메인으로 두고, 추위에 언 몸을 녹여줄 소내장으로 만든 전통 수프 플라키(Flaki)를 곁들이기로 했다. 아! 중요한 게 빠졌다. 다름 아닌 맥주.^^V
“익스큐즈미~ 맥주 500 플리즈~”
“우린 500은 없고 400이랑 1리터 있어요.”
“아... 그럼 1리터 주세요! 맥주부터 주세요!”
습관처럼 500을 말했다가 500이 없대서 잠시 당황했으나 어차피 500 두 잔은 할 운명이었기에 그냥 1리터를 시켰다. 맥주 1리터는 한국에서 본 적이 없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기도 했다. 슬슬 목이 말라 올 때쯤 드디어 맥주가 나왔다. 두둥! 500과는 스케일이 완전히 달랐다. 흔히 아는 500잔과 생긴 건 똑같은데 당연한 얘기지만 더 컸다. 거인들의 잔 같았다. 손잡이를 잡고 첫 모금을 마셔보려는데 부러질까 봐 나머지 한 손으로 잔을 떠받들었다. 허세 좀 보태서 자칫 잘못하면 한 손으로 들다가 손목이 나갈 것 같았다.
1리터 맥주의 위엄에 감탄하고 있는 사이 주문한 음식들이 차례로 나왔다. 먼저 골론카부터. 사실 폴란드에 온 이래로 1일 1 골론카 중이었다. 한식으로 치면 골론카를 밥으로 삼은 것이다. 앞서 우리나라의 족발과 거의 흡사하다 했는데, 칼로 썰어 먹는 족발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두툼하게 한 덩이가 나오니 슬라이스로 썰어서 나오는 족발보다 정갈함과 깔끔함은 덜하지만, 썰어먹는 재미와 먹음직함은 더 했다. 맛은 딱 양념 족발 맛, 특히 이번에 시킨 건 스파이시 버전이었는데 역시나 익숙 맛이었다. 바로 불족. 물론 우리나라만큼 맵지는 않았다.(사실 1도 안 매웠다.)
한국 사람이라면 국을 빼놓을 수 없다. 자꾸만 골론카로 향하는 포크질을 잠시 멈추고 숟가락을 들었다. 이번엔 플라키를 맛볼 차례. 소내장이라해서 약간 걱정이 있었다. 대개 내장이 들어간 음식은 호불호가 있는 경우가 있으니까. 우려했던 소내장은 국물에 완전히 녹아 있는 듯했다. 숟가락을 휘저어봐도 야채와 면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국물 맛이 짭짤하면서도 찐했다. 완전 소주각. 요거면 혼자서 한 3병 정도는 거뜬할 것 같았다.(완전 개허세다^^;;)
식사가 다 끝나갈 무렵 서비스로 과일주가 나왔다. 체리시럽을 넣어 만든 보드카였다. 크으~ 달콤하다가 상큼하다가 쌉싸름한 맛으로 마무으리. 오늘도 1일 1 혼밥(겸 1 골론카도)에 성공했다. 그런데 계산을 마치고 나오면서 충격적인 사실 한 가지를 알게 됐다. 가게 내외부를 딱 봤을 때 빨강빨강한게 너무나 폴란드스러워서 당연히 폴란드 음식점일 거라 생각했는데 실상은 체코 음식점이었다.(What?!) 결국에 내가 먹은 건 체코 음식점에서 파는 폴란드 음식이었던 셈이다. 아무렴 어떠랴, 맛있게 잘 먹었으면 그걸로 된 거다. 난 오늘 최고의 폴란드 전통음식을 먹었다.라고 위안을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