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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향기

누가 바르샤바 별로래? - Episode Ⅲ

by 트래볼러

먼지 한 톨 떠다니지 않을 것만 같은 맑은 공기에 찐파란 하늘, 여기에 햇살까지 따스하니 의욕을 잃었다. 빨빨거리며 여기저기 돌아다닐 의욕 말이다. 바르샤바 구시가지(Rynek Starego Miasta Warszawa)로 향하던 중 날씨에 무릎을 꿇어버렸다. 결굴 구시가지 초입 잠코비 광장(plac Zamkowy)의 어느 펍 야외 테라스에 엉덩이를 붙이고 맥주를 시켰다.

테라스에 앉아 격하게 광합성을 하며 멍을 때렸다. 넓은 광장을 한가득 메우는 사람들의 재잘거리는 소리와 구슬픈 아코디언의 선율 속에 홀짝홀짝 맥주를 마시며 한껏 느슨해진 몸과 마음을 더 느슨하게 만들었다. 이 정도의 여유와 낭만이라면 꼭 구시가지를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물론 갈대와 같은 내 마음이 과연 언제 또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뒷일은 생각하지 말고 지금 이 시간이 지루해질 때까지 계속 머물러 있기로 했다. 최소한의 들숨과 날숨으로 (근근이) 살아있음만 유지했고, 머릿속은 관장약을 먹고 난 후의 장처럼 말끔히 비워내 아무 생각이 없는 경지에 도달했다. 만약 현재의 내 심박수와 뇌파를 측정해본다면 아마 눈을 뜬 채 유명을 달리한 사람처럼 나왔을지도. 그만큼 심신이 정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행복 그 자체였다.

광합성 중
낮맥은 못 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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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로운 잠코비 광장의 오후

한창 행복에 심취해 있는데 묘령의 여인이 나타났다. 중세 시대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한 폴란드 전통의상에 눈부신 햇살보다도 더 빛나는 금발머리를 양갈래로 따고서는 빨간색 머리띠를 한, 누가 봐도 전형적인 미인이었다. 부처가 아니고서야 어찌 이런 미인 앞에서 마음이 요동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적이었던 내 마음에 순간 파동이 일었다.


“익스 큐즈 미~^^”


보고만 있어도 설렘 설렘 한데 나에게 말까지 걸어오다니, 이게 머선일이고!?!? 그러면서 한 손에 들고 있던 피크닉 바구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쓱~ 내게 건넸다.


“디스 이즈 포유^^”

“오! 리얼리?”


꽃이었다. 설마... 나 지금 헌팅당하고 있는 거니? 그리고 이 꽃은, 그린라이트!? 몰랐다, 내가 폴란드 여자들의 이상형일 줄은.^^V

한때(짝꿍이 없던 시절) 여행지에서의 로맨스를 꿈꾼 적이 있다. 여행 중 우연히 만나 함께 여행을 하며 자연스럽게 정도 쌓고 추억도 쌓고, 떠날 땐 혼자였지만 돌아올 땐 함께인 그런 여행. 나의 로망이었다. 하지만 짝꿍이 있는 지금은 로망조차도 용납될 수 없는 법!(사실 혼자 여행을 온 것만으로도 큰절 올릴 일이다. 그대의 너그러운 윤허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난 좋으면서도 불편한 이 상황을 어떻게 하면 부드럽게 넘길 수 있을지, 어떻게 말해야 최대한 상처 받지 않게 거절할 수 있을지 열심히 짱구를 굴렸다. 역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랑 고백에는 정공법이 최고였다. 순간의 충격은 클지라도 여운은 짧을 테니. 손바닥을 보이며 미안하지만 여자친구가 있다고 말하려는데,


“3즈워티에요.^^”


아... 그런 거였구나.^^;; 뼛속까지 민망했다. 행여나 이 상황을 지켜보며 비웃고 있는 이가 있을까 빛보다 빠른 속도로 주변을 스캔했다. 다행히 여자와 나만의 비밀로 묻어둘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임 쏘리^^;; 노 땡쓰.”


덕분에 거절하기는 쉬웠다. 마음속으로 계획하고 연습했던 것보다도 더 단호하게 말했다. 여자는 말이 끝나기도 채 무섭게 휙 등을 돌리더니 바로 다른 타깃을 물색했다. 진득이처럼 질질 물고 늘어지지 않아 편하긴 했지만 한편으론 이상하게 섭섭하기도 했다. 애초에 내가 상상했던 그림은 이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여자가 떠난 후, 여운이 남은 쪽은 오히려 나였다. 민망함과 창피함의 여운이 온몸을 감쌌다. 더 이상 여기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얼른 자리를 뜨고 싶었다. 잠시나마 나를 설레게 했던 (어쩌면 꽃향기였을지도 모를) 여인의 향기는 잠코비 광장에서의 추억으로 고이 담아 두고 다시 바르샤바 구시가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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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사람들은 꽃선물이 일상생활화 되어 있을 만큼 꽃을 좋아한단다. 그래서인지 길거리에 꽃 노점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 여인도 저기서 사서 영업을 뛴 거겠지?ㅡ.ㅡ
바르샤바 구시가지 골목
바르샤바 구시가지 광장 (Rynek Starego Miasta Warsza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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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대전과 바르샤바 봉기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던 것이 이렇게 복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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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예술가들 덕분에 광장은 야외 갤러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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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좋은 오후에는 역시 테라스가 진리
광장 정중앙에 있는 바르샤바 인어 (Syrenka Warszawska) 기념비, 바르샤바에 관한 전설 속에 등장하는 바르샤바를 지키는 수호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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