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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샤바에서 쇼팽 찾기

누가 바르샤바 별로래? - Episode Ⅳ

by 트래볼러

꼬꼬마 시절 TV로 보는 만화에는 진심이었지만 종이로 보는 만화책에는 영~ 관심이 없었다. 당시의 난 그냥 종이로 된 ‘책’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모든 것을 싫어했다. 이런 내가 적어도 50번 이상은 보고 또 본 유일무이한 만화‘책’이 하나 있다. 크으~(엄지척!) 제목만 떠올려도 벌써부터 재밌는 이 희대의 역작은 바로 ‘드래곤볼(Dragon Ball)‘이다. 드래곤볼은 주인공인 손오공을 중심으로 7개를 모으면 소원을 하나 들어준다는 드래곤볼을 찾아 여행을 떠나며 펼쳐지는 모험담을 그린 만화다.(이제 보니 드래곤볼도 따지고 보면 여행기였다! 어쩌면 난 이때부터 여행을 꿈꿨는지도...) 폴란드 여행 중에 뜬금없이 웬 드래곤볼 타령이냐고? 바르샤바 여행을 검색하던 중 보게 된 한 흥미로운 기사가 드래곤볼을 소환했다. 폴란드 하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피아노의 시인‘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 그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바르샤바에 총 15개의 음악 벤치를 설치했다는 기사였다. 일명 쇼팽 벤치(Chopin Bench). 최고급 품질의 스웨덴 화강암으로 만든 벤치에 있는 Play 버튼을 누르면 쇼팽의 피아노곡이 흘러나온단다. 핸드폰으로 QR코드를 인식하면 곡도 다운로드할 수도 있다고 하니 몹시 궁금해졌다. 그래서 드래곤볼을 찾아 떠난 손오공의 심정으로 난 바르샤바에 있다는 15개의 쇼팽 벤치를 찾아 떠나기로 했다. 자, 그럼 어디서부터 가야 하나... 호랑이를 잡으려면 당연히 호랑이 소굴로 가야 하는 법! 먼저 이름에서부터 대놓고 쇼팽이 들어가 있는 쇼팽 박물관(Muzeum Fryderyka Chopina w Warszawie)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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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기념품 숍과 음악 아카데미
쇼팽 박물관(Muzeum Fryderyka Chopina w Warszawie)

쇼팽 박물관에는 쇼팽의 출생부터 사망까지, 쇼팽에 관한 모든 것이 있었다. 그가 사용했던 악기와 악보는 물론 가구, 가족사진, 자화상, 자필 편지 등이 전시되어 있어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쇼팽으로서 뿐만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의 쇼팽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쇼팽은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만큼이나 애국심도 강했는데 유명한 일화로 프랑스 파리에 음악 공부를 하러 갈 때도 폴란드의 흙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 또한 프랑스 유학 당시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폴란드의 독립운동을 위해 연주회를 통해 벌어들인 수입도 폴란드로 보냈단다. 폴란드 사람들이 바르샤바를 쇼팽의 도시라 하며 왜 이렇게까지 쇼팽을 극진히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외에도 그의 애국심이 가장 잘 드러난 일화가 또 있었다. 죽기 직전 누이에게 남겼다는 유언이다.


「나의 몸은 프랑스 파리에 있지만, 나의 영혼은 조국 폴란드와 늘 함께했어. 내 심장을 폴란드에 묻어줘.」


하지만 누이는 쇼팽의 유언을 들어주지 못했다. 쇼팽이 사망하고 시신을 폴란드로 가져가려 했으나 러시아가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에 쇼팽의 누이는 몸을 가져갈 수 없다면 심장만이라도 가져가고자 쇼팽의 심장을 따로 빼내 알코올이 담긴 상자에 밀봉하여 러시아 출입국 관리 몰래 바르샤바로 가지고 들어왔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고향에 돌아온 쇼팽의 심장은 현재 쇼팽이 유년시절에 뛰놀던 크라코프스키 프르제드미에치에(Krakowskie Przedmieście) 거리(이름 한번 겁나 길고 어렵다;;;)에 있는 성 십자가 성당(Kościół Świętego Krzyża)에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그나저나 이것 때문에 온 게 아닌데;;; 쇼팽 벤치를 찾으러 왔다가 쇼팽에 빠져버렸다.

쇼팽 박물관 안에는 쇼팽 벤치가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쇼팽 박물관인데 여기에 없을까 싶어 박물관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봤다. 박물관 뒤편으로 높은음자리표 동상이 있는 작은 공원이 보였다. 느낌이 빡! 왔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에서 봤던 그 벤치가 떡하니 있었다. Play 버튼을 누르고 앉아 잠시 음악을 감상했다. 하나를 찾았으니 이제 다음은 어디로 가나... 답은 정해져 있었다. 쇼팽이 심장이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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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필체가 뭍어있는 악보와 당시 음악회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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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이 입었던 의상과 쇼팽의 마지막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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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마지막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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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 10월 17일 프랑스 파리, 쇼팽은 더 이상 없다
쇼팽의 데드마스크와 머리카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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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 박물관 뒤편의 높은 음자리표 조각상이 있는 공원(Skwer Bohdana Wodiczki), 여기에 쇼팽 벤치가 있다
쇼팽 박물관 쇼팽 벤치 Play On~♪ (곡정보 : Ballad in F minor, Op.52; 42")

성 십자가 성당 안, 이 안 어딘가에 쇼팽의 심장이 묻혀있다고 했는데... 옳거니! 분명 저기다. 유독 사람들이 몰려있는 저 기둥. 기둥 주변에서 사람들이 하나같이 인증샷을 찍고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기둥에 쇼팽의 흉상이 있는 명패가 있고 그 아래 이렇게 쓰여 있었다.


「HERE RESTS THE HEART OF FREDERICK CHOPIN (여기에 프레드릭 쇼팽의 심장이 쉬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둥 앞에서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뭐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은 들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쇼팽 박물관에서 쇼팽의 일대기를 보고 와서인지 왠지 짠했기 때문이다. 기둥만 카메라에 담아 조용히 성당을 나왔다.

성당 바로 앞, 거리에 반가운 녀석이 보였다. 두 번째로 찾은 쇼팽 벤치. 이번에도 역시 Play 버튼부터 눌렀다. 음악을 들으며 한껏 쳐진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충격적인 사실 하나를 알게 됐다. 이제 보니 쇼팽 벤치 위에 있는 그림이 쇼팽 벤치가 설치된 지도였던 것이다. 나에게는 보물지도였다. 왜 여태 이걸 몰랐지? 하는 의문도 잠시, 이제 보물지도를 손에 넣었겠다 보물을 찾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음악이 끝나고 이번에는 지도를 따라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우선은 가장 가까운 곳부터 하나씩 뽀개는 걸로.

성 십자가 성당(Kościół Świętego Krzyż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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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십자가 성당 입구에서
성당 내부, 왼편 사람들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이 바로 쇼팽이 잠들어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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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심장이 묻혀있는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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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프레드릭 쇼팽의 심장이 쉬고 있다
찾았다 요놈! 성당 바로 앞 길거리에서 발견! 저렇게 지도가 선명한데 이제야 알게 되다니;;;
성 십자가 성당 앞 쇼팽 벤치 Play On~♪

8살의 쇼팽이 첫 피아노 공연을 가졌던 바르샤바 대통령궁(Pałac Prezydencki) 앞에서 하나, 이어서 왕의 루트(Royal Route)*를 타고 쭉~ 올라가 잠코비 광장에서도 하나를 찾았다. 지금까지 총 4개, 이제 11개 남았다. 하악하악. 정말로 숨이 찼던 것은 아니다. 날이 어두워지며 저녁때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배가 고팠다. 저녁을 먹고 마저 찾을까? 아니면 내일 다시 찾을까? 머릿속에서 천사와 악마가 싸우기 시작했다.


천사 왈 : 이왕 찾기 시작한 거 끝까지 찾아야지. 10개? 지도도 있으니까 이제 금방 찾을 거야!^^

악마 왈 : 됐어! 그냥 밥이나 먹고 숙소 가서 푹 쉬어~ 내일 다시 찾으면 되지.


보통은 천사보다는 악마가 속마음을 대변한다. 아무래도 내면의 난 쉬고 싶었나 보다. 엎치락뒤치락거린 끝에 최종 승리자는... 악마다.(권선징악이 아니라 죄송^^;;) 마지막으로 숙소 방향에 있는 와지엔키 공원(Łazienki Królewskie)의 쇼팽 벤치만 하나 더 찾기로 하고, 나머지는 내일 다시 찾기로 했다. 그런데 역시 악마보단 천사의 말을 들어야 했다. 내일은 내일의 여행이 또 있었기에, 다음 날 다시 찾으러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시 쇠뿔은 단김에 빼야 한다. 그렇게 결국 만나지 못한 10개의 쇼팽 벤치는 기약 없는 훗날을 기약하게 됐다.

*왕의 루트(Royal Route) : 과거 왕족이 왕궁에서 여름 궁전으로 이동했던 길로, 짧게는 성 십자가 성당에서 바르샤바 구시가지, 길게는 빌라누프 궁전(Muzeum Pałacu Króla Jana III w Wilanowie)에서부터 시작되는 길을 말한다.
바르샤바 대통령궁(Pałac Prezydencki)
바르샤바 대통령궁 앞 쇼팽 벤치 Play On~♪ (곡정보 : RONDO in C minor, Op.1; 32")
잠코비 광장(plac Zamkowy)
잠코비 광장 쇼팽 벤치 Play On~♪ (곡정보 : WALTZ in E-flat major, OP. 18; 39")
와지엔키 공원(Łazienki Królewskie) 쇼팽 기념비(Pomnik Fryderyka Chopina)
와지엔키 공원 쇼팽 벤치 Play On~♪ (곡정보 : Polonaise in A minor, Op.40 No.1;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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