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답정너
당신이 사랑에 빠지는 시간, 단 0.2초. 미국 시러큐스대학과 웨스트버지니아대학교 연구진이 공동으로 진행했던 연구결과 그렇단다. 0.2초 동안 과연 뭘 보고 사랑에 빠질 수 있단 말인가? 서로의 얼굴(외모)밖에 더 보나? 그런데 처음 보는 그 얼굴에 모든 데이터가 다 들어있어 그 사람의 성향을 대충 다 파악하게 된단다. 그만큼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말. 책에 있어 표지는 독자들에게 책의 첫인상을 좌지우지하기에 내실 있는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다. 그렇기에 평소 내 주관으로 잘 결정하는 편이지만 표지만큼은 결정이 쉽지 않았다. 제목을 잘 표현하는지, 전체적인 책 내용과 어울리는지, 사진이 들어간다면 갬성도 한 모금 담겨있는지, 디자인이 촌스럽지는 않은지 등 고려해야 할 것들이 은근히 많았다.
여행 에세이이기에 표지에 사진을 넣기로 했다. 일단은 출판사에서 기존에 보냈던 사진들 중 몇 개를 선별하여 시안을 만들어 주었다. 총 6가지의 시안이 왔다. 과연 어떤 사진을 썼을지 기대되는 가운데, 메일을 열어보니 전혀 예상 밖의 사진들이 들어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유럽여행 사진이 많아 유럽 사진 중 하나일 거라 예상했는데 온통 필리핀 팔라완 사진이었다. 예상 밖의 전개에 살짝 당황스러웠다. 좋아, 사진은 그렇다 치고 디자인은? 호불호가 확실하게 갈렸다. 사진이 크게 들어간 시안은 우선 탈락! 사진과 디자인이 적당히 배합된 게 안정적으로 보였다.(사진으로 꽉 찬 표지는 뭔가 형용할 수 없는 거부감이 있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동그란 액자 안에 사진이 들어가 있는 것 같은 시안이었다.(1번 시안) 심플한 디자인이었지만 그래서 보기가 편했다. 개인적으로 어렵고 복잡한 책에는 취미가 없는 사람으로서 독자들이 내 책을 봤을 때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하게 느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이 시안으로 선택했... 까 하는데 계속 눈에 밟히는 시안이 하나가 더 있었다. 비교적 사진이 크게 들어간 시안이지만 전체를 꽉 채우지는 않아 사진이 부각되면서도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마찬가지로 디자인도 심플했다.(2번 시안) 두 시안 사이에서 갈팡질팡, 요래 보면 요게 괜찮은 것 같고 저래 보면 저게 괜찮아 보였다. 도저히 내 손으로 하나를 버릴 수 없어 나 대신 선택을 해주십사 온 동네방네 들쑤시고 다녔다. 결과는? 1번 낙찰!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과 함께 미소가 지어졌다. 마치 2번이 아니길 바랬던 사람처럼 말이다. 그랬다. 사실 답정너였던 것. 확실히 1번이 좋은데 그렇다고 2번을 버리자니 아까워 그 아까워하는 마음을 버리고자 여기저기 묻고 다닌 것이었다. 아마 2번이 낙찰됐다면 1번이 낙찰될 때까지 재투표를 했을지도 모른다.
시안을 결정했으니 이제 다시 문제의 사진을 결정할 차례. 개인적으로 유럽 사진을 쓰고 싶었다. 뭔가 갬성하면 그래도 동남아보다는 유럽이니까. 일단 유럽, 동남아 구분 없이 표지로 쓸 만한 다른 사진이 있는지 하드디스크를 털었다. 그렇게 구석에서 끄집어낸 새로운 사진들로 기존 시안에 사진만 바꿔 샘플 시안을 만들어봤다. 그리고 이번에도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물론 내 마음속의 답을 안고서. 결과는? 내 답과 일치했다.^_^
시안에 사진까지, 표지 선정을 모두 마치고 나니 어쩌면 모두가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답정너였다는 것을. 아무튼 내가 겪어야 할 선택 장애를 대신 겪어주신 모든 분들께, 이 글을 빌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