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캠핑이 기다려진다
집 인테리어를 하게 되면서 세간살이를 다 들어냈다. 이사는 아니지만 이사 가는 기분. 장롱 밑에선 먼지에 둘러싸인 500원짜리 동전이 나왔고, 책상 서랍 밑에서는 어느 순간 갑자기 증발해버렸던 필기구들이 서프라이즈처럼 쨘~ 하고 나타났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 이제는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힌 소품들이 하나둘씩 발견되니 나름 반가웠다. 요놈들! 어디 안 가고 숨어 살고 있었구나.
가구 밑 못지않게 베란다 보일러실 창고 또한 추억 노다지였다. 초딩시절 X알 친구들과의 추억이 깃든 사이즈 240의 스피드 스케이트는 올 겨울 신어도 될 만큼 날이 여전히 날카로웠다. 보물찾기에 맛을 들인 난 더 집요하게 창고를 털었다. 그리고 제일 아래 구석에서 묵직한 박스 하나를 발견했다. 한 손으로 부족해 친히 두 손으로 마중 나간 그 박스 안에서는 고대 유물이 발견됐다. 묵직한 박스만큼이나 웅장한 스케일을 자랑한 그것은 바로 텐트다.
이 텐트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30년 정도 된 일명 아빠 텐트. 아빠의 유품이다. 내가 아주 어릴 적, 그러니까 (나와 8살 차이 나는) 동생이 태어나기도 전 아마 두어 번쯤 사용했으려나? 연식은 조상님이지만 사용 횟수로는 아직 신상급이라는 말. 텐트 커버를 열어 안에 구성물을 확인했다. 텐트 본체와 플라이, 폴, 팩, 스트링 등 기본 구성품들이 모두 그대로였다. 충분히 쓸 수 있을 것 같아 나중에 텐트 피칭을 해보기로 하고 일단 다시 봉인해두었다.
인테리어 공사가 끝나고 봉인되었던 아빠의 텐트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다시 창고 구석으로 처박히는 신세가 됐다. 펴봐야G~ 펴봐야G~ 하다가 동네 근처에 적당한 피칭 포인트 찾지 못한 것. 옛날 같으면 학교 운동장에서 한번 스윽~ 펴봐도 됐을 텐데 요즘은 아시다시피 학교에 아무 때나,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다. 할 수 없이 다음에 진짜로 캠핑 갈 때를 기약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지인들과 캠핑을 가게 됐다. 캠핑 장비를 모두 갖춘 캠핑러와 함께 하기에 사실 내가 텐트를 가져갈 필요는 없었지만 혹시나 싶어 아빠 텐트를 챙겼다. 캠핑장에 도착해 사이트를 꾸미고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짬을 내 아빠 텐트를 봉인 해제했다. 감격의 순간ㅠ 30년간 독방에 갇혀있다가 이제야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됐다. 커버에 붙어 있는 구성품 및 설치방법(얼마나 보관이 잘되었으면 아직도 글자가 선명했다.)을 보며 텐트 피칭을 시작했다. 살짝 긴장됐다. 30년 만에 완성시키는 아빠의 유품이기도 하거니와 요즘이야 워낙 기술이 좋아 던지면 펴지는 텐트도 있고(말 그대로 pitching이다.) 구조가 단순해 폴도 많이 필요 없지만 옛날 텐트는 폴도 많고 설치하는 방법도 까다로워 혼자서 치기는 어렵다는 (뜬?) 소문을 종종 들었기 때문이다. 우선 본체를 쫙~ 펼치고 폴을 조립했다. 다 조립하고 보니 앞서 친 지인의 최신식 눈피크 텐트에 비해 폴이 확실히 많았다. 그렇다고 사이즈가 더 큰 것도 아닌데... 다음으로는 폴을 본체에 끼워 세울 차례. 끼우는 것은 요즘 것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으나 끼운 후 고정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었다. 끼우면 알아서 고정이 되는 요즘 것들과는 달리 아빠의 텐트는 중간중간에 있는 고리로 일일이 고정시켜주어야 했다. 폴을 다 끼웠으면 이제 들어 올리면 끝. 하지만 양쪽에서 잡고 일으켜 세운 순간 걸어둔 고리들이 빠지는 경우가 발생했다. 세운 걸 다시 내리자니 나머지 고리마저 다 빠져버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것 같고 한쪽에서 들고 있는 상태로 나머지 한 사람이 왔다 갔다 다시 고리를 재정비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몇 번을 왔다 갔다 한 끝에 본체 앞쪽과 뒤쪽(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뉘어 폴이 들어갔다. 폴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을 차례로 세웠다. 그리고는 위에 플라이(본체가 젖는 것을 막아주는 텐트의 지붕)를 대충 얹었다. 드디어 텐트 완성! 완성하고 보니 컬러와 디자인이 쪼금 촌스러워 그렇지 상태는 최상급이었다.
내친김에 눈피크 텐트는 접어두고 아빠 텐트에서 잘까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최상급 보관 상태조차 커버할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팩이 문제였다. 플라스틱 팩인지라 파쇄석에는 박히지가 않았다. 갑자기 문득 어린 시절 아빠 텐트로 놀러 갔던 기억이 났다. 캠핑이기보다 계곡으로 피서를 가서 텐트를 치고 놀았었는데 아마 플라스틱 팩도 잘 박히는 흙바닥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아빠 텐트와 함께 인증숏을 남기고 이만 철거했다. 무너뜨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파르르 풀이 죽는 텐트를 보니 못내 아쉬웠다. 쇠 재질의 팩 세트를 꼭 사야겠다. 그래서 다음에는 아빠 텐트로, (마음만이라도) 아빠와 함께 캠핑을 해보련다. 다가오는 가을, 다음 캠핑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