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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볼러 Oct 12. 2017

크라쿠프행 마지막 야간열차

시작부터 삐걱삐걱, 마침내 크라쿠프

드디어, 폴란드에 도착했다! 지금 난 바르샤바 쇼팽 공항(Lotnisko Chopina w Warszawie)이다.


폴란드의 3월은 아직 좀 쌀쌀하다. 그렇다고 겨울까지는 아니고, 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시기인 것 같다. 우리나라의 3월과 비슷하다.


공항을 빠져나와 바르샤바 중앙역으로 향한다. 첫 여정은 폴란드의 현 수도인 이곳, 바르샤바(Warszawa)가 아닌 옛 수도였던 크라쿠프(Kraków)에서 시작할 예정이다. 바르샤바에서 크라쿠프로 가기 위해서는 바르샤바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야 한다. 해외여행 중 지하철이나 버스는 타봤어도 기차는 처음이다. 처음은 역시 설렌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예정대로였으면 바르샤바 중앙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크라쿠프행 열차를 타는 건데, 공항을 나와보니 입국 수속에서 예상보다 너무 오랜 시간을 잡아먹어버렸다. 비행기에서 읽은 '폴란드(가보고 싶은 나라 알수록 재미있는 나라)'라는 책에서 폴란드 사람들은 일처리가 늦다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나오는데만 거의 1시간이 넘게 걸렸으니... 덕분에 그다음 차인 막차를 타게 될 것 같은 불길한 기운이 점점 날 감싼다. 그렇게 되면 아마 바르샤바 중앙역에 도착해서도 2시간을 넘게 기다려야 될지도 모른다. 크라쿠프에 도착해서 숙소에 체크인하면 아마 새벽 4시쯤 되려나? 첫날부터 어깨에 곰 세 마리 예약이다. 그래도 이런 변수 정도는 있어줘야 진짜 여행이겠지? 라며 긍정의 아이콘인 척, 최대한 지금의 이 설렘과 즐거움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다.




그 사이 어느새 바르샤바 중앙역에 도착했다. 매표소에 부착된 시간표를 보니 한 15분만 빨리 왔어도 바로 탈 수 있었다. 15분. 그 정도는 충분히 단축시킬 수도 있었다. 공항에서 정류장까지 뛰었으면, 정류장에서 헤매지 않고 버스표를 사서 바로 탔으면, 버스에 내려서 중앙역 매표소까지 뛰었으면. 그렇기에 아쉬움이 더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도 난 아마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폴란드로 오면서 '서두르다'와 '빨리빨리'라는 단어는 내 책상 서랍 가장 아래 칸에 깊숙이 모셔두고 왔으니까. 막차가 확정되니 마음이 편하다. 탈 수 있을까? 못 탈까?라는 조바심도 내지 않아도 되고.


2층 대합실에 내 동지들이 제법 많다. 초등학생 시절 준비물을 안 챙겨간 날, 나 말고 다른 친구들도 안 가져왔을 때의 위안이랄까? 난 지금, 혼자가 아니다.


크라쿠프행 막차를 기다리는 내 동지들


열차를 기다리면서 책을 펴고 노트북도 켰다. 숙소와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 메일로나마 늦을 것 같다고 보냈는데 다행히도 바로 답장이 왔다.


'우리 프런트는 24시간 항시 대기 중이야. 그러니까 걱정 말고 안전하게만 와~!'

- from. 나탈리아 -


더 이상 할 게 없어졌을 무렵 나의 구세주가 오셨다. 크라쿠프행 마지막 열차!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꺼내 놓은 책과 노트북을 얼른 챙겨 탑승 게이트로 향했다. 이제야 마음이 좀 놓인다.


기분 좋게 열차에 올랐다. 난생처음 타보는 다른 나라의 기차다. 당연히 그 안의 모습도 처음이다. 그런데 어딘가 낯익다. 왠지 영화에서 본 것 같다. 어떤 영화더라... 맞다! 해리포터에서 봤던 호크와트 행 기차!

유럽의 기차들은 원래 이렇게 생긴 건지, 처음 타봐서 잘 모르겠지만 마냥 신기하다.


사람 한명 지나갈 법한 좁은 복도, 사람이 적은 막차여서인지 스산한 기운이 맴돈다
이 칸은 다 내차지다!


이제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잘 알다시피 시간과 싸울 때는 잠이 최고의 무기다. 선반 위에 짐을 올려놓고 딥슬립 모드로 들어간다. 점점 몸이 나른해지고 정신이 희미해지려는데... 갑자기! 누군가 날 깨운다. 


"헤이! 어쩌고 저쩌고, 솰라솰라 솰라~~"


같은 칸에 타는 사람인가 했더니 열차 승무원이다. 비몽사몽 간이라 내 귀의 영어 듣기 능력이 평소보다도 현저히 떨어져 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통 못 알아듣겠어서 으레 짐작으로 티켓을 내밀었다.


"아니, 깊이 잠들면 위험해! 짐을 도둑맞을 수도 있어. 웬만하면 깊이 잠들지 마!"

"아! 감사합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각해보니 깊이 잠들어버리면 그냥 무방비 상태였다. 승무원은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겠지만 세심한 배려가 새삼 고마웠다. 비록 단잠이 드려는 날 깨웠던 그 순간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싫었지만.




감은 듯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지 어느덧 4시간 30분. 드디어 크라쿠프 중앙역에 도착했다. 기뻐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티켓에 적힌 예상 소요시간은 4시간이었는데 30분 정도 지연됐다. 아마 비가 와서 그런 것 같다. 바르샤바에서는 안 왔는데 어디서부턴가 비가 내렸다. 크라쿠프에서는 안 내리길 바랐었는데 새벽에는 하느님께서도 주무시나 보다.


역 밖으로 나왔다. 우산이 있지만 쓰지 않기로 했다. 폭우는 아니고 그냥 적당히 추적추적 내리는 비였기에, 이 정도는 맞고 다니는 게 유럽 사람들이니까. 나도 지금 이 순간부터는 유러피언이 될 거니까.


이번 여행에서는 첫날 숙소만 미리 예약을 하고 나머지는 그때그때 구하기로 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짜인 여행보다는 조금은 즉흥적인 여행을 하고 싶었다. 만약 못 구하면? 그냥 길바닥에서 자면 되지! 아름다운 유럽의 거리 전체가 내 숙소라면 그것도 나름 멋지지 않을까? 물론 상상만 낭만적일 뿐, 실제 그런 상황이 닥친다면 현실은 그냥 궁상맞고 처량한 동양인 노숙자 일지도... 아마 짐 지키느라 잠도 못 잘 것 것이다.


비를 맞으며 걷기를 10분. 숙소에 도착했다. 로비에서 나탈리아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늦은 시간 비까지 맞으며 오느라 고생했다며 음료수 한 잔을 건넨다. 갈증이 심하게 났던 터라 숨도 안 쉬고 원샷!

카~~~ 살 것 같다! 아니, 살았다!!!


숙소는 파티 클럽 테마의 파티 호스텔이다. 아니나 다를까 새벽 4시인데도 파티가 한창이다. 파티룸이 있는 지하에서 신나는 음악과 외국인들의 흥겨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 일찍 도착했으면 나도 저기에 있는 건데. 아무리 열정으로 꽉 차 있는 나지만 지금은 도저히 함께 할 수가 없었다. 휴식이 필요했다. 짐 정리도 내일로 미뤄두고 일단 얼른 씻고 자야겠다는 생각뿐이다. 나의 첫 혼자 유럽여행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테니까.




서울에서 출발해 폴란드 크라쿠프에 도착하기까지. 생각했던 그대로, 아주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크게 틀어진 것도 없었다. 생각보다 조금 늦었고, 생각보다 조금 더 지쳤지만 결국에 난 크라쿠프에 무사히 도착했다. 상황이 내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고 내 예상을 자꾸만 벗어날 때면 마음이 불안해지고 짜증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나를 점점 더 힘들게 만들 뿐이었다. 그보다는 이미 벌어진 상황은 겸허히 받아들이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됐다.


나 홀로 유럽여행의 첫날.

처음으로 오랜 시간 동안 혼자 세상을 돌아다니며 느끼고 배운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오늘의 경험으로 배운 것들은 마음에 고이 넣어두고 이만 이불을 덮는다.


도 브라 노츠!

(Dobranoc)


도 브라 노츠(Dobranoc) : 잘 자! (Good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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