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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래볼러 Oct 09. 2017

끝나지 않은 악몽,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그들의 아픔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아우슈비츠의 여운이 여전히 생생한 가운데, 오디오 세트를 반납하고 완전히 아우슈비츠를 빠져나왔다. 쉽지 않은 투어, 쉽지 않은 여행이 끝이 났다. 오랜 시간 걷기,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가이드의 설명에 집중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격하게 요동치는 감정을 추스르는 일이었다.


한 걸음씩 아우슈비츠에서 멀어질수록 긴장이 풀린다. 마음도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가는 느낌이다. 그 순간, 익숙한 음성이 다시 내 귀의 달팽이관을 타고 들어온다.


"비르케나우에 가실 분들은 이쪽으로 모여주세요."


분명 오디오는 반납했는데... 익숙한 우리 가이드의 목소리다. 투어 내내 초집중을 해서 인지 먼 거리에서도 선명하게 들린다.


"더 없으신가요?"

"여기요! 저도 갈 거예요!"

 

막차를 향해 몸을 내던지듯, 행여나 서툰 내 영어를 못 알아들을까 손까지 번쩍 들고뛰었다.


"이제 가실 분들은 다 오신 것 같네요. 비르케나우까지는 버스를 타고 갈 거예요. 약 10분 정도 걸립니다. 다 같이 버스정류장으로 가시죠!"


내가 구매한 투어는 원래가 비르케나우까지 포함된 투어였다.(그렇다고 무조건 가야 하는 건 아니다. 개인 사정에 따라가지 않아도 무방하다.) 아우슈비츠에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렇게 비르케나우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풀어졌던 마음의 긴장이 다시금 조여 온다. 다시 힘든 여행의 시작이다. 힘든 여행을 왜 굳이 계속하느냐고? 그 이유는 이미 아우슈비츠에서 깨달았다. 힘들지만 가보아야 한다. 더 알아야 하고 더 보아야 할 것이 있다면 힘들고 불편하더라도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이 곳에 온 거니까...




<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 - 아우슈비츠 제 2 수용소 >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Auschwitz-Birkenau)는 나치 독일이 유럽에 있는 유태인들의 대거 학살을 그 목적으로 하는 '최종적 해결'이라는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세운 여섯 군데의 강제 수용소 중에서 그 본부 격이며, 또한 가장 악명 높은 곳이었다. 원래는 1940년 나치 독일 점령군에 의해 처음에는 폴란드인, 이후에는 소련군 전쟁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세워졌으나, 곧 여러 다른 민족들을 모두 가두는 감옥이 되었다.
1942년에서 1944년 사이에 이곳은 본격적인 대량 학살이 자행된 수용소로, 유태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고문당하고 죽음을 당했다. '아우슈비츠 1'이라는 이름의 최초 수용소는 본래 폴란드의 정치범들을 수감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점차 다른 수용소들의 행정 본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아우슈비츠 2'(비르케나우)는 중심적인 집단 학살 수용소였으며, 80만 명의 유태인이 죽음을 당한 장소이다.

※참조: 네이버 지식백과
아우슈비츠 제 2 수용소, 비르케나우의 기차역


가이드 말대로 정확히 10분 만에 비르케나우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나와 첫 발을 땅에 내딛자마자 더욱 거세진 빗줄기가 내 뺨을 강타한다. 나치 독일이 저지른 대량 학살의 최절정이라 할 수 있는 이 곳에 오자 날씨도 최절정에 이르렀다. 마치 날씨가 내 마음을 알고 내 마음따라 움직여주는 것 같다. 함께 공감해주는 존재가 있다는 건 그 어떤 것보다 든든한 위안이 된다. 그게 사람이든 다른 무엇이든 간에...


날씨의 든든한 지지 속에 가이드를 따라 비르케나우로 들어갔다.


이 역이 삶의 종착역이 될 것이라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비르케나우의 첫 느낌이 의외로 나쁘지 않다. 넓은 광야에 곧게 쭉 뻗은 철로, 푸른 초원이 답답한 가슴속을 뻥! 뚫어 주는 것 같다. 하지만 말 그대로 앞뒤 사정 생각 안 하고 풍경만을 봤을 때의 느낌일 뿐. 속사정을 알게 되는 순간 끔찍한 현장의 음산함과 공포가 몸속을 휘젓는다.


넓고 푸르른 초원 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었을 수용소들이 오와 열을 맞춰 늘어서 있다. 이제는 보기만 해도 혐오스럽게 짝이 없다.

곧게 뻗은 철로는 강제 이송되는 유대인들과 폴란드 사람들을 태운 기차가 다녔던 길이다. 기차가 들어와서 멈추면 사람들이 내리는 즉시 바로바로 선별작업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앞으로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면서, 어떤 기준으로 선별이 되는지도 모르면서, 말 그대로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시키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던 그 상황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상상만으로도 오싹해진다.


철장 뒤로 보이는 수용소 건물들, 아우슈비츠 수용소들 중 최대 규모다
강제 이송되는 사람들로 가득했을 기차


가이드의 인솔 아래 철길을 따라 쭉 걷는다. 철길 양 옆으로 보이는 수용소들의 모습이 황량하다. 그 시절 수용소와 소각장의 굴뚝에서 아마 쉴 틈 없이 연기가 피워졌을 것이다.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서 재를 남기고 연기가 되어 굴뚝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을 것이다. 그제야 자유를 얻었을 것이다. 만약 사후세계가 있고 그 사후세계에서 우리가 영혼의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면 지금 이 곳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영혼들이 떠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유를 얻었지만 갈 곳이 없는 영혼들, 세상에 미련이 남아 여전히 이 곳을 맴돌고 있는 영혼들...



기찻길 끝에 도착하니 그 영혼들을 달래기 위한 추모비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추모비 앞에서는 그들의 후손들이 그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궂은 날씨에도 모자를 뒤집어쓰고, 우산을 쓰고 모여있는 사람들. 곧 한 소년이 가운데로 나온다. 손에 들려있는 건 아마 추도문인 것 같다.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천천히 읊어 나간다. 단순히 국어책을 읽는 것이 아닌 감정을 담아 읽고 있음이 이스라엘 어를 모르는 나에게도 전해져 온다.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추모문이 끝나고 다른 소녀가 마이크를 잡는다. 그리고 노래를 시작한다. 뒤이어 모든 사람들이 따라 부른다. 마찬가지로 알아들을 수 없는 가사에 처음 듣는 멜로디지만 우리나라 민요인 아리랑만큼이나 구슬프다. 이따금씩 흐느끼는 소리도 들려온다. 절로 두 손이 모아지고 고개가 숙여진다.


추모의식을 진행 중인 이스라엘 학생들




추모의식이 한창인 가운데 사진을 찍는 게 예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그건 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진심을 다해 추모하는 모습을 남겨야겠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비슷한 아픔을 가진 나라의 국민으로서 과연 우리들은 이처럼 진심으로 아파하고 애도하고 있는지 뒤돌아 볼 수 있게 해주는 사진이 될 것이기에.


우리에게는 과거의 역사지만 그들에게는 현재의 역사이자 앞으로도 계속될 역사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아픔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이 아픔이 언제쯤 완벽하게 치유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과거 일제강점기나 6.25 전쟁의 여파로 아직까지 아파하고 있는 우리나라처럼.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매년 돌아오는 과거의 그 날에, 그 일을 기억하며 진심으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일이 아닐까? 비록 피부로 체감할 수는 없지만 매년 반복되는 추모의식이 그들의 아픔을 해마다 조금씩 치유해주고 있을 거라 믿는다.


언젠가는 아픔이 과거가 될, 그 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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