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석영 Aug 06. 2018

이탈리아 여행기(5)

#5. 다섯 개의 보석, 친퀘테레

2017.10.22~30 이탈리아 밀라노/꼬모-베네치아-피렌체(피사)-친퀘테레-로마 여행기




 어제의 우울함은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아침부터 마음은 들떠있었습니다. 호스텔 버스를 타고 리오마죠레로 갈 때까지만 해도 비가 부슬부슬 내려 큰일 났다 싶었는데, 마치 ‘그래 너 어제 마음고생 많았지? 오늘은 우리가 선심 좀 쓴다!’하듯 오후에는 햇빛이 쨍쨍해졌습니다. 리오마죠레는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마을을 구경하다 작은 성당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 앉아있는 마리아상을 바라보고 있으니 평온해집니다. 왜 이런 기분이 느껴지는 걸까 한참 생각을 하다가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뜯어보았습니다. 큰 왕관을 쓰고도 아무 표정이 없어 보이는 그녀. 아니 오히려 살짝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는 제법 적당한 무게의 왕관을 여유롭게 견디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너무 가볍지도, 너무 무겁지도 않아서 나의 짐에 대해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친퀘테레 숙소 조식
@ 친퀘테레 리오마죠레

 밖에 나와서는 마을이 다 내려다보이는 카페 겸 와인 바에서 에스프레소를 시켜 잠시 휴식. 자리가 너무 좋아 저녁에도 여기에 와서 와인을 마셔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사실 리오마죠레에서 마나롤라로 가는 길이 ‘사랑의 길’로 불리는 유명한 산책로인데, 제가 갔을 때에는 공사로 인해 철문이 굳게 닫혀있었습니다. 그 앞에 다닥다닥 달려있는 사랑의 자물쇠들이 연인들의 실망감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지요. 저는 살면서 누군가와 함께 자물쇠를 걸어본 적이 없는데, 그 날 그 수많은 자물쇠들을 보면서 망상에 빠졌습니다. 이 중 얼마큼의 연인들이 아직도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을지, 이 곳에 다시 오면 걸어두었던 자물쇠를 보고 뿌듯해할까, 이런 자물쇠를 뜯어가는 사람들은 무슨 심보일까 그런 잡다한 것들을 궁금해하면서 말입니다. 친퀘테레에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음엔 꼭 이 사랑의 길을 누군가와 함께 걸어보리라 다짐하고 뒤로 돌아섰습니다.     

@ 고소했던 에스프레소
@ 사랑의 길 앞에 채워진 자물쇠들


 다음 마을 마나롤라. 도착하자 점심시간이라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먹물 파스타, 그러니까 까만 면을 좋아하는데 메뉴판에 떡하니 먹물 파스타가 쓰여 있길래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바로 그것을 주문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주문한 파스타는 면이 검은 것이 아니라 소스 자체가 먹물인 파스타였습니다. 뜨악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지요. 점점 까매지는 파스타를 보며 제 속도 까매졌지만 막상 한 입 먹어보니 나쁘지 않았습니다. 마을 반대편으로 걸어가 바라보는 마나롤라는 마치 바다 깊은 곳 바위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알록달록한 보석들처럼 느껴졌습니다. 친퀘테레의 이름이 괜히 ‘다섯 개의 보석’이 아니구나 싶었지요. 이탈리아의 건물들은 항상 그런 느낌인 것 같습니다. 불안정함 위에 서있는 포근함. 한참을 그 자리에서 예쁘다 예쁘다 감탄하다 다음 마을인 코닐리아로 향했습니다.     

@ 말 그대로 먹물 파스타
@ 친퀘테레 마나롤라
@ 레몬으로 만든 제품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코닐리아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하늘이 맑아졌습니다. 그것이 추진력이 되어 마을을 더욱 샅샅이 파헤치고 다니게 되었지요. 코닐리아는 이전 마을 마나롤라보다는 상권이 더 발달한 느낌이었습니다. 독특한 소품 가게나 옷가게를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젤라또를 하나 손에 쥔 채, 날씨에 취해서는 일정에 없었던 코닐리아-베르나짜 산책로(라기보다는 등산로)를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초반엔 너무 인적이 드물어 다시 되돌아갈까 싶었지만 간헐적으로 보이는 베르나짜를 향한 화살표가 저의 변덕을 잠재워주었습니다. 이거 산책로 맞아? 싶을 정도로 급경사의 오르막길을 한창 걷다가 뒤를 돌아보고, 또 한창 올라가다 뒤를 돌아보고를 반복했습니다. 코닐리아는 안에 있을 때보다 멀리서 바라볼 때가 훨씬 예쁜 마을이었습니다. 간간이 보이는 선인장은 저의 갈증을 뾰족하게 찌르는 듯했습니다. 이렇게까지 고된 길인 줄 모르고 물 한 통 들고 오지 않은 제 자신을 원망했습니다.  


   

@  친퀘테레 코닐리아


 그러나 절반쯤 왔을 때부터는 내리막길이 시작되었습니다. 내리막도 꽤나 급경사라 조심조심 내려가는 중에 호스텔에서 만난 사브리나를 마주쳤습니다. 그녀는 저와는 반대로 베르나짜에서 코닐리아로 가는 길이었는데, 한참 내리막길을 신명 나게 걷다가 이제 막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조금만 더 가면 엄청난 내리막길이 있을 거라고 그녀를 격려했습니다. 베르나짜에 거의 다다랐을 때 너무 도저히 들어가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카페를 발견했습니다. 생오렌지주스를 한 모금에 꿀꺽해버린 채 고대로 앉아 보석을 실은 함선처럼 보이는 베르나짜를 한참 구경했습니다. 오늘 이만큼 고생한 것에 대한 보상을 아주 톡톡히 받은 듯해 행복했습니다. 계산을 하려 기다리고 있는데 주인이 어디서 왔냐고 묻습니다. 한국에서 왔다니 €4가 한국어로 뭐냐는 뚱딴지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사’라고 얘기해주니 그대로 ‘사’라는 발음을 따라 합니다. 옆에 서있던 가족과 다 같이 한 바탕 웃고는 베르나짜로 내려왔습니다.     


@ 베르나짜로 가는 길
@ 친퀘테레 베르나짜


 나름의 하이킹을 끝내고 나니 꽤 지쳐 다시 기차를 타고 리오마죠레로 건너 가 깔라마리를 먹으며 야경을 구경했습니다. 와인을 마시러 오전에 봐 둔 곳으로 다시 올라갔더니 문이 닫혀있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 주위에 석양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아 앉아있었습니다. 가끔은 잘 듣지 않는 노래가 특정한 순간에 정말이지 뜬금없이 생각이 나는 때가 있는데 그 날이 그랬습니다. 박새별의 '한 여름밤의 꿈'을 들으며 감상하는 리오마죠레의 하늘은 참 고요했습니다. 파란색 바탕에 갑자기 핑크색 구름들이 폭죽처럼 모여들더니 폭발이라도 한 양 점점 어둑어둑해지는 하늘. 그리고 하나둘씩 밝혀지기 시작하는 건물들의 불빛. 이렇게 작고 조용한 동네에서 사는 건 또 어떤 기분일까 궁금해졌습니다. 골목골목 야경을 구경하다 호스텔 셔틀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만난 장면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이끌려왔고, 그 첫인상은 역시나 맞았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새삼 뿌듯했던 친퀘테레에서의 이틀이었습니다.


@ 깔라마리
@ 친퀘테레에서의 마지막 밤


매거진의 이전글 이탈리아 여행기(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