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로마는 로마구나
2017.10.22~30 이탈리아 밀라노/꼬모-베네치아-피렌체(피사)-친퀘테레-로마 여행기
더블린에서 유럽 국가로 여행을 갈 때 주로 ‘라이언 에어’라는 저가 항공사를 이용했습니다. 이 항공사의 가장 큰 장점은 아주 저렴한 가격(장점은 그게 다지요). 단점은 잦은 지연, 이름이나 여권번호 잘못 기재 시 수정 작업 까다로움, 항공권 변경 및 환불 불가, 물 한 모금도 사 마셔야 하는 각박함, 올해부터는 기내용 캐리어도 5유로 추가 등으로 단점이 훨씬 많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유학생에게 이 장단점의 경중이 오직 '저렴한 가격' 단 하나뿐일지라도 장점에 기우는 것은 인지상정이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귀찮은 일은 보딩패스를 늘 실물 프린트로 출력해서 비행기 탑승 전 도장을 받아야 한다는 것(NON-EU 국가 시민일 경우)이었습니다. 또 보딩패스는 비행기 타기 딱 이틀 전에나 출력이 가능해서(추가금액 내지 않는 이상) 여행 중에 인쇄할 수 있는 곳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보딩패스를 출력하기 일쑤였지요.
* 잠깐 라이언에어 상식(!) : 비행기 예매 시 국가 선택을 할 때, 남한/북한이 나누어지지 않고 KOREA/KOREA로 되어 있어 상당한 혼란이 있습니다. 이때 두 번째 KOREA를 클릭하세요.(North가 South보다 알파벳 상 앞 순위라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보딩패스 출력하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를 뒤늦게 깨달아 부다페스트에서 더블린으로 돌아올 때 북한 국민으로 입국했지요... (다행히 보딩패스를 꼼꼼히 보지 않아 운 좋게 넘어갔지만, 혹여나 생길 불상사는 예방하는 게 훨씬 좋겠지요. 혹시나 이미 북한으로 선택했을 경우에는 라이브 채팅으로 직원에게 바꿔달라고 요청하면 됩니다.) 혹시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라이언에어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라이브 채팅으로 직원에게 바로 물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한국처럼 즉시 일처리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나름 문제점을 빠르게 처리해줍니다. 출력한 보딩패스는 반드시 공항 라이언에어 데스크로 찾아가서 '비자 스탬프'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도 모르고 있다가 한 승무원이 다음부터는 꼭 스탬프를 받아오라고 당부하여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지인 중 한 명은 실제로 스탬프를 받아가지 않아 탑승 거부가 된 사례가 있습니다. 여러모로 NON-EU는 서럽습니다.
여행을 다니다 보니 노하우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보통은 호스텔에서 무료로 프린트를 해준다는 것입니다! 로마에서의 숙소는 에어비앤비이기 때문에 친퀘테레를 떠나기 전에 호스텔에 부탁하여 출력을 완료했습니다. 숙소가 굽이 굽이 높은 산 앞에 위치해 있어, 버스는 한 시간에 한 대. 시골길에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듯 초조했습니다. 버스는 다행히 제시간에 왔고 라 스페치아 역에 다시 도착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탈리아의 기차는 다른 유럽 지역보다 시간도 잘 맞춰 오고, 지연된 적도 없었기에 기차로 이동하기 참 편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이탈리아 어디든 안 예쁜 곳을 찾기가 손에 꼽기에(어쩌면 꼽을 수 없을지도), 그냥 의자에 기대어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루할 틈이 없었지요. 드디어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장기간 이동에 배가 고파 역 앞에서 조각 피자를 하나 사 먹고는 숙소로 찾아갔습니다.
로마에 도착했을 당시에 핸드폰 인터넷이 갑자기 안 터지기 시작해 한참을 같은 길을 뱅뱅 돌고 나서야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집이 너무 예쁘고 깔끔했습니다. 호스트는 영어를 잘 하지는 못했는데 뭔가 설명해주고 싶은 것들이 많은 듯했습니다. 짐만 풀고 빨리 로마를 보고 싶었지만 호스트가 만들어주는 에스프레소와 저를 위해 준비한 갖가지 간식들 소개를 들으며 감동을 받아 그 자리에서 다과회를 좀 더 즐겼습니다. 시간은 벌써 오후 4시가 넘었고, 저는 베네치아 광장으로 갔습니다. 베네치아 광장 앞은 말 그대로 ‘카오스’였습니다. 버스든 일반 차든 무섭도록 질주하고 있어 감히 횡단보도를 건널 수가 없었지요. 겨우겨우 길을 건너 광장에 올라 건물을 살펴봤습니다. 이탈리아 국기를 휘날리는 양측 단상 사이에 용맹하게 말을 타고 있는 이 사람(비또리오 에마누엘)이 이탈리아의 통일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하필 하늘의 구름마저 장엄하여 참 멋있는 건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에는 뜨레비 분수로. 뜨레비 분수를 찾아가는 길이 여태까지 갔던 이탈리아의 그 어느 곳보다도 붐볐습니다. 바글바글 거리는 사람들 틈바구니로 겨우 길을 뚫어 앞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뜨레비는 아주 아주 맑은 물색과 역동적인 조각들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보는 내내 경쾌함이 느껴졌습니다. 로마에서도 가장 오래된 수로로 이 분수에서 그대로 물을 공급받고 있다고 합니다. 밤에 보는 뜨레비가 그렇게 예쁘다는데, 아직 보지 않았음에도 밝은 조명과 함께 잔잔히 빛날 분수가 상상되어 기대감이 더욱 커졌습니다. 이런 분수들을 보면 동전을 던지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저는 예전에 한 번 더블린 한 공원에서 어떤 남자가 동전들을 긁어가는 것을 본 이후로는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번엔 스페인 광장으로 향했습니다. 이탈리아에 웬 스페인 광장인가 했는데 스페인 대사관이 이 자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광장의 무수한 계단을 올라 로마의 석양을 처음으로 마주했습니다.
우와. 여기도 핑크빛 구름이 피어오르네. 이쯤 되면 이탈리아에게 '하늘색'의 정의란 우리가 알고 있는 보통 하늘색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녁에는 꼬모에서 만났던 친구와 일정이 맞아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이탈리아의 북부를, 이 친구는 남부를 돌았기 때문에 그간 여행했던 곳이 어땠는지 서로 사진을 보여주기도 하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친구와 얘기하며 다음에는 꼭 남부를 돌아봐야겠다고 다짐했더랬습니다. 식당에 들어가기 전에 같이 버스킹을 구경했는데 한 곡만 듣고 가려는 찰나에 버스커가 “앞에 계신 아리따운 여성 두 분을 위해 이 곡을 연주하겠습니다.”라고 저희를 콕 집어 얘기하는 탓에 감히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립서비스에 한 번 감탄, 그의 목소리에 두 번 감탄하며 결국 그 친구의 무대가 모두 끝날 때까지 얌전히 자리를 지키다 일어서고야 말았지요.
식당에서 파스타와 와인을 사이좋게 나눠 먹고는 여행지에서의 들뜸이 약간의 취기와 맞물려 아주 신나게 거리를 활보했습니다. 어느 골목에서는 사람들이 노천 식당에서 늦은 시간까지 여유롭게 식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또 어느 골목에서는 신부님들이 함께 하쿠나 마타타를 부르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메모지를 나무판자에 못질하고 있었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해 뭘 하는 건지 물어봤습니다. 신부님은 소원을 종이에 적어서 이 곳에 못을 박아주면 우리가 당신을 위해 기도를 해주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사실 가톨릭 신자입니다. 아니, 사실 10년 넘게 고해성사도 보지 않은 저에게 신자라는 말은 과분하니 ‘친 가톨릭’이라고 하면 적절할지요. 가톨릭의 중심지인 로마에서 신부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레 성당에 자주 갔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바로 내일 바티칸에서 미사를 봐야겠다고 갑작스러운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걷고 또 걷다가 내일이면 더블린으로 돌아가는 친구와 작별 인사를 하고 저도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늘 뭔가 딱딱 세워진 계획안에서만 미묘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그 융통성 없던 제가, 이렇게 여행을 하면서 즉흥적으로 뭔가를 결정하고 때로는 과감히 포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참 신기했습니다.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는데. 갑자기 변한 건 아니고 몇 년간의 시간을 지나 천천히 변한 거니까 괜찮겠지? 은근 걱정하면서. 긍정적인 변화인지 부정적인 변화인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 날 내렸던 즉흥적 바티칸행은 좋은 결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