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재현의 윤리에 대하여
※ 영화 〈나를 찾아줘〉의 결정적인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영화 〈나를 찾아줘(2019)〉의 마케팅 포인트 중 하나는 극중 홍경장(유재명)과 정연(이영애)의 육탄전이었다. 홍경장은 정연의 얼굴에 주먹을 연거푸 내리치고, 정연을 집어던져 덧문을 산산조각 부수면서 바닥에 메다꽂고, 쓰러진 정연의 배를 발로 걷어찬다. 칼을 휘둘러 얼굴에 상처를 입히고, 발등을 찍고, 총을 쏜다. 나는 전시(展示)되는 폭력을 보며 그것이 불가피한 일이었는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재현의 윤리성. 무엇을 보여주고 보여주지 않을 것인가. 보여준다면 어떻게,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
재현의 윤리성은 비단 격투 장면에 국한되지 않는다. 실종된 아이를 찾아 헤매는 부모의 이야기인 〈나를 찾아줘〉는 (영화에서 직접 비추는 현수막처럼) 2019년 지금도 실재하는 누군가의 실제 고통이기 때문에 소재 자체부터 같은 범주의 문제를 품고 있다. 실제 사건과 누군가의 고통은 스토리와 촬영한 이미지, 편집, 음악, 캐릭터 등으로 재구성될 수밖에 없고, 직접 가져오지 않은 이야기라도 영화의 뉘앙스와 톤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사정을 떠올릴 누군가에게 고통과 상처를 안겨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평론가 듀나는 트위터에 “제목이 왜 ‘나를 찾아줘’여야 하는지 의아했는데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니 동의가 됐다”는 요의 말을 한 적이 있다. 듀나의 말을 확대 해석하여 나는 작품 출발점에서부터 품고 있는 폭력의 재현, 재현의 폭력성이란 윤리적인 우려를 〈나를 찾아줘〉가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이야기하려 한다. 보기 전에 가졌던 의아함이 영화를 보고 난 후 해소된 것처럼, 〈나를 찾아줘〉는 소재와 마케팅이 주는 선입견에서 비롯된 우려를 신중함과 조심스러운, 사려 깊음에서 비롯된 걸음으로 납득시키며 조심스럽게 나아간다.
영화는 윤수가 실종된 지 6년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한다. 아이를 찾는 일과 생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남편(박해준)과 정연이 적절히 분담한. 윤수로 짐작되는 아이를 발견했다는 제보를 받고 찾아가긴 하지만 섣부른 희망이나 기대는 품지 않는. 아이를 찾는 일에만 전념하느라 저축 따위는 바닥을 드러내어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는. 하지만 부부 관계는 (여러 파고를 잘 지났는지) 어떤 지점에서 안정적인. 이야기 진행 속도도 집중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맞춰져 있어서 빠르고 효율적이다. 남편은 예상보다 빨리 죽고 정연이 돌아가는 길도 생각보다 멀지 않다.
정연은 이야기의 주 무대가 되는, 윤수로 추정되는 민수(이시우)가 있는 만선바다낚시터(이하 낚시터)에 예상보다 빨리, 단호하게 도착한다. 여기에서부터 이야기는 세 가지 층위를 본격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는 가부장제의 폭력성이다. 낚시터에는 크게 세 세대가 어울려 산다. 낚시터 주인이자 지역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갖고 있는 노년 부부, 딸도 며느리도 아니지만 함께 지내는 중년 여성과 그녀와 내연 관계에 있는 홍경장, 낚시터에서 일하는 홍경장보다 힘 혹은 나이에서 밀리는 남성 둘, 인근 남성 둘과 낚시터에서 착취당하는 어린이들 민수와 지호.
정연이 낚시터에 왔을 때 이들은 민수가 눈에 띄지 않게 숨기고 태연하게 정연과 함께 식사를 한다. 다음 날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이들의 비밀을 눈치 챈 정연이 운전하면서 사이드미러로 뒤를 돌아봤을 때 나란히 선 노인 부부와 홍경장과 여성, 일꾼과 지호의 모습은 마치 이상적인 ‘정상가족’ 같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삼촌, 그리고 아이로 구성된 대(大)정상가족. 하지만 영화는 나이가 어리거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거나 착취당하고, 권력을 쥐고 있는 남성 아버지의 폭력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보여준 후다.
홍경장과 정연의 난투 공연(公演)은 이러한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보여주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처럼 보인다. 가정과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을 ‘보호’라는 명목으로 얼마나 착취할 수 있는지, 자신의 힘과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숨겨진 진실을 드러내는 장치. 뿐만 아니라 가부장제를 옹호하는 논리 중 하나인 ‘가족을 부양하는 남성 아버지’라는 틀이 그렇기 때문에 내 가족이 아닌 이들에게는 얼마나 더 잔인하고 부조리해질 수 있는지도 최반장(김종수)을 통해 보여준다.
고(故) 김근태 의원은 수기(手記)에 고문보다 고통스러웠던 두 가지 순간을 든다. 크리스마스 즈음 고문실에 달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라디오 DJ의 밝은 목소리와 쉬는(?) 시간에 자신의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나누던 고문관의 통화 내용(딸의 시험 성적 따위) 등이다. 두 가지 장치는 자신이 사라져도 세상은 변화가 없을뿐더러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라디오 DJ의 밝은 목소리) 메시지와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는 이가 악마가 아니라 한 집안의 평범한(?) 가장이자 아빠라는 사실을 전달해 심리적으로 무너뜨리기 위해 매우 세심하게 배치한 설정이었다.
하지만 이 설정은 커다란 진실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낚시터에서 유일하게 민수를 챙기고 살피던 최반장은 민수가 납치된 윤수일 지도 모르고, 낚시터에서 착취당하며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밝혀지면 전과자인 당신이 다시 일을 구할 수 없을 테고, 그럼 아직 어린 당신의 아이가 공부하고 먹고 살 길이 없다는 논리를 들며 정연의 뒤통수를 삽으로 후려친다. 홍경장 역시 미국에서 공부하는 아들에게 학비와 생활비를 보내고 있고, 민수의 진실은 그의 생계와 아들의 공부를 위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정연의 살해를 공모한다.
지호를 구출한 정연은 낚시터에서 빠져 나오면서 가로막는 최반장을 홍경장의 총으로 쓰러뜨려 힘에 의해서 자신마저 위험해질 수 있는 가부장성의 위험성을 보여주고, 뒤쫓는 낚시터 할아버지의 귀를 총으로 날려버림으로써 “(진실을) 듣지 않고 살면 된다.”는 태도를 응징한다. 홍경장은 지호를 데리고 뻘밭으로 도망간 정연을 ‘총’으로 쏘려다 물에 젖은 총알이 폭발하면서 제 눈을 다쳐 앞을 ‘보지 못하게 된다.’ ‘수갑’으로 정연을 제압하려 하지만 수갑은 제 손에 채워지고 수갑이 민수의 목숨을 앗아갔듯, 홍경장 역시 차오르는 밀물 속에서 죽는다.
여기에서 그쳤다면 〈나를 찾아줘〉는 페미니즘을 업데이트한 평범한 영화에 그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악의 화신으로서의 가부장을 살해하고 여성이 아이를 구하도록 함으로써 관객의 윤리 감각과 얄팍하게 타협하고 가벼운 카타르시스를 주는 데 성공했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나는 이 영화를 이토록 지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목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이 영화의 두 번째 윤리적 층위는 특정한 누군가를 악으로 고발하는 대신 우리 모두 갖고 있는 ‘악의 평범성’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민수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낚시터에 왔고, 민수에 대한 어른들의 성적·육체적 착취는 범죄다. 하지만 아무도 민수가 윤수인지,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지호의 엄마 노릇을 하는 여성은 정연이 찾아오자 “민수가 진짜 윤수면 어떡하냐?”면서 불안해하고, 낚시터 노인 부부는 “몇 년 전에 나타났는데 윤수인지 민수인지 어떻게 아느냐?”는 대화를 나눈다. 낚시꾼 한 명은 정연 앞에서 정연이 나눠준 전단지를 버린다. 감독은 적극적으로 무관심함으로써 우리가 범죄와 착취에 적극적으로 공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고발한다.
〈나를 찾아줘〉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지옥 같은 밤을 보낸 정연은 윤수라고 생각했던, 파도에 휩쓸려 사라진 민수 대신 지호에게 무릎을 내주고 있다. 떠나지 말라는 지호에게 알았다고 대답한 정연은 아무도 없는 뻘밭에 나가 “숨 쉬는 근육까지 마비시키는” 약물이 든 병과 주사기를 꺼내 제 손에 찌르려고 한다. 정연은 어젯밤 자기가 낳은 아이 윤수를 잃었고, 자신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아이 지호가 윤수를 대체할 수 없다. 내(가 낳은) 아이와 남의 아이라는 구분. 가부장제의 그것.
하지만 그 순간 정연은 바닷물이 빠진 후 묫바위에 걸린 민수의 시체를 발견하고 (영화는 친절히 복선을 배치해두었다.) 제 몸에 주사를 놓는 대신 아이에게 달려간다. 정연은 아이 몸 이곳저곳을 살피고 더듬으며 오열하는데 윤수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아이에게서 발견하지 못한다. 민수는 윤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정연은 진심으로 민수라는 아이의 죽음에 진심으로 슬퍼하게 된다. 그리고 지호를 ‘아들’로 품는다. 아무런 갈등 없이 정연이 지호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다면 그것 역시 얄팍한 타협처럼 보였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영화를 보며 세월호가 떠올라, 세월호에서 죽은 아이들이 떠올라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밀물이 빠르게 들어오는 와중에 지호를 데리고 뻘밭으로 도망친 정연이 지호를 작은 낚싯배에 태우는 데 성공할 때, 차오른 바닷물이 목구멍으로 들어가는데 “나만 보지 않고 듣지 않은 거냐”고, “나만 죽어야 하느냐?”고 홍경장이 절규할 때, 민수가 바닷물에 휩쓸려 들어가기 직전, 겁에 질려 방파제 끝에 서 있다 참고 참았던 단어 “엄마”를 나지막이 내뱉었을 때, 그리고
민수가 바닷물에 휩쓸려 사라지고 자신의 집에서 깬 정연이 윤수의 방 앞에 떨어져 있는 물을 발견했을 때, 문을 열어 보니 온몸이 흠뻑 젖은 어린 윤수가 침대에 앉아 있을 때, 아이가 “엄마, 추워.”라고 말할 때, 정연이 젖은 아이를 온몸으로 안아줄 때 나는, 지켜보는 많은 어른들 앞에서 “엄마”를 찾으며 죽어간 세월호의 아이들과, 돌아오지 아이들의 텅 빈 방과, 젖은 아이들의 몸을 끌어안고 통곡했을 아이들의 부모들이 생각나서 나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