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성화고 김동준
중등 친구들과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은유, 돌베개)》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몇 주 동안 ‘특성화고’라는 조건에서 우울과 가난과 차별만 읽어내던 학인들은 지난 주 비로소 얼마나 김동준 들을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는지 발견했습니다. 똘추는 학생 수가 많지 않고, 대학에 가는 이가 별로 없고, 대부분 친하게 지낸다는 특성화고의 특징이 대안학교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면서 “학교 밖과 안 청소년의 구분이 모호한 것 같다”고 했으며, 은결은 (집이 가난해서) 돈을 벌어야만 할 거라고, 또래들이 공부하는 시기에 일을 해야 해서 불행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돈을 벌어 뿌듯하다는 인터뷰를 읽으며 자신의 편견을 발견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매리언 울프는 《다시, 책으로(어크로스)》에서 깊이 읽기를 강조하며, 책이 “타인의 관점을 취해봄으로써 우리가 지닌 공감의 감각이 (중략) 세계에 관한 우리 내면의 지식까지 넓어지”게 한다고, “책들, 그리고 그 속에 거주하는 ‘친구들’의 삶과 감정들로 창조되는 수많은 세계에 우리 자신을 몰입시킬 수 있는 인지적 인내심을 서서히 잃어간다면 결국 많은 것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따비)》에서 엄기호는 책을 읽느냐, 영상을 봐도 되느냐가 아니라 “이것들을 통해서 타자의 세계에 대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느냐가 리터러시의 핵심이라고 강조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타자를 알 수 없다, 알기란 쉽지 않다”는 전제가 리터러시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같은 책(《유튜브》)에서 김성우는 노인들이 카톡을 공유하는 등의 행위를 비웃기 전에, 그들이 충분히 텍스트 문화를 누리고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시간들을 가졌는지 물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들을 비난하고 혐오하기 전에 텍스트를 깊이 읽고 찬찬히 살피는 것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 인프라와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마침 얼마 전에 함께 책을 읽는 모임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이상한 관점을 가진 사람은 충분히 질문하고 고민할 수 있는 시간과 조건을 갖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다고.
사람을 납작하게 이해하지 않는 일. ‘평화위 보고서’를 읽으면서 많이 질문하고 오랫동안 들여다봤던 지점도 학교의 평가 방식, 영향력 항목 들이었습니다. 문제해결능력, 일머리 따위가 학교에서 중요한 것 같다는 설문 결과를 보며 우리는 한 사람의 다양한 우주를 각자, 서로 충분히 탐색할 수 있는 시간과 관점과 도구와 태도를 갖고 있나, 하는 질문을 던지고 곰곰이 곱씹고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신(神)이면서 자기 자신인 존재와 밤새 씨름을 해서 겨우 새 이름을 얻었다는 ‘욥’(《아픈 몸을 살다》)이 떠오릅니다. 새 이름을 얻은 후 욥의 엉치뼈가 틀어진 것은 섣불리 다가가지 말고 천천히, 조금 주춤거리라는 의미일 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