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하고 회피하고자 했던 갈등에 대하여
마케터로 살아가면서 끊임없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고, 어떤 선택이 소비자에게 더 와닿는 메시지일지를 고민하게 된다. 가설부터 검증, 다시 전략 수립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내적 갈등은 물론이고 사람들 간의 갈등도 반복된다.
어떤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이 짙어지기 시작한 건 마케터라는 직업을 택한 뒤에 더 많아진 것 같다. 이 메시지? 이 소재? 이 콘텐츠? 이 이벤트? 직업을 갖는 일과 월급을 받는 일은 언제나 그에 대한 책임의 무게를 지니게 된다.
강단이 없고 우유부단한 나는 이럴 때마다 내적 갈등이 심해진다. 근거를 기반으로 선택을 하는 일은 언제나 늘 최고의 선택이 아닌,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인 경우가 많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내적 갈등의 모습은 늘 회피하고 싶고, 선택을 외주화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사실 갈등은 매일 만난다.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지’부터 시작해서, ‘어떤 걸 사지?’, ‘퇴사를 할까?’ 등의 여러 갈등들. 혼자서 하는 내적 갈등이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문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의 갈등이었다. 단순히 시간이 지난다 해서 해결되지 않았다. 소복하게 쌓인 눈이 거리의 쓰레기를 덮어서 마치 거리가 ‘깨끗하게’ 보이는 것처럼, 갈등도 내버려 두면 그저 미결된 채로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만 했다.
갈등은 왜 그렇게 직면하기 싫었던 걸까. 갈등의 뜻을 톺아보면 조금 알 수 있지 않을까. 갈등이라는 단어 중 갈은 칡 나무를 뜻하고, 등은 등나무를 의미한다. 이 두 나무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각각 줄기가 꼬아 올라간다. 이 중에서 유독 고약한 건 칡 나무인데, 칡은 가만히 자라도록 내버려 두면 그 땅을 못쓰게 만들 정도로 땅을 헤집어놔서 유해식물로 불리기도 한다. 약재로도, 식재로도 쓰이는 칡에게 이런 사연이 있는지 몰랐다. 오죽하면 농부들 사이에서는 칡으로 뒤덮인 땅이 있으면 포기하라고 말할 정도다.
종종 삶은 칡 나무로 뒤덮여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을 마주한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썩 유쾌하지 않은 감정이 고개를 내밀어 마주하게 된다. 갈등을 마주할 때마다 회피하거나 다 끝내버리고 싶었다. 관계도 끊어내고 싶고,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난 그렇게 올라온 감정들을 가지고 과거의 것들을 모두 지워버린 적이 있었다. 글쓰기 계정을 운영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글을 모두 지워버리고 계정을 탈퇴했다. 게임 때문에 싸웠을 때는 홧김에 계정을 탈퇴해 버렸다.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팀 내 갈등을 마주할 때마다 다 때려치우고 나가고 싶었다. 모든 일을 다 마무리하고 ‘졸업’을 하는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출발보다도, 이 시기의 ‘갈등’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자퇴라는 선택지를 늘 고민했었다.
하지만, 갈등은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에리히 프롬은 갈등을 피하면 인간이 마찰 없이 돌아가는 기계가 된다 말했다. 갈등은 자신의 영혼을 마주하고, 자신의 내면을 확고히 갈고닦는 기회이기도 하고, 또 다른 측면에서는 감정을 극복하고 강해지는 기회이기도 하다. 갈등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종종 나는 왜 나의 감정이 무미건조한 걸까. 왜 남들은 화가 나는 상황에도 화를 내지 않고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면서 넘어갈 수 있는지 생각했다. 단순히 성격이 무던한 걸까? 싶었는데 그저 갈등을 회피하면서 모든 감정을 내려두고 불균형한 감정으로 살아가고 있던 게 아닐까. 자기 자신의 감정을 가져오지 못하면서, 항상 타인의 감정에 의존하고 타인의 감정을 모방하면서 살아오고 있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스스로를 잘 몰랐다는 걸 느낀다. 글을 쓰지 않았더라면 평생을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내린 진단이 오진일지 모르지만, 갈등 회피 증후군을 고쳐나가기 위해 더 많은 감정을 마주하고자 한다. 때론 끝까지 싸우며, 때론 격동하는 감정을 마주하기도 하면서 내면에 있는 감정들을 차별 없이 돌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