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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요선 Aug 30. 2020

아홉수를 생각하며

아홉수는 있다. 아홉수는 과학이다.

20대 중반 이후 부터는 딱히 한 살 한 살 먹는 것에 크게 감흥이 없었던 것 같다. 워낙 젊음을 예찬하는 한국에서, 그것도 여자로 살다보니 나도 나이 먹어가는 게 싫기도 했고, 매년 세웠던 새해 목표들이 10년 넘게 제자리(매년 내가 세우는 목표는 운동하기, 책읽기, 돈 모으기, 영어 공부하기이다)인 걸 보면서 더이상 나를 자책하고 한심해하기도 싫었으며, 무엇보다 그냥 앞으로의 삶에 큰 기대가 없었다.


늘 노력하는 것에 비해 결과는 나쁘지 않았기에 그냥 이렇게 어찌저찌 사려나 보다는 마음과 동시에 늘 기대하는 바에는 미치지 못했기에 무기력했다.


그런 나에게도 29살이라는 나이는 나름 상징적이라 나는 2020년에 과하게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2019년 10월부터 빨리 2020년이 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스타벅스를 미친듯이 다녔고 스타벅스 다이어리를 세 개와 볼펜두 개를 받았다. 그냥 2019년 10월부터 뭐라도 열심히 하면 된다는 걸 알았지만 2020년에는 진짜 뭔가를 제대로 할 생각이라 에너지를 아낀다는 마음으로 "내년엔 진짜 열심히 살 거라 지금은 마저 이렇게 살아도 괜찮아!"라는 개소리를 했다.  


그리고 그럼에도 내가 생각하는 정도의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면 차선책을 선택하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뭔가를 하려고 했냐. 이번에야말로 연기를 제대로(!) 하려고 했다. 회사원들이 매일매일 꼬박꼬박 출근하는 것처럼 프로필을 돌리고, 싫은 일도 꾹 참고 감내하고, 아주 작은 기회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려보리라 다짐했다. 나를 평가하는 사람들을 평가하지 않고, 내가 어떤 이야기에서 어떤 역할을 맡든 자의식을 발휘하지 않고 맡게 된 그 자체에 감사하리라. 그래서 정말 정말 정말 싫어했던 방송 연기 학원(방송가 캐스팅 디렉터들과 연이 있는 학원을 의미함)에서 나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않는 수업들을 꾸역꾸역 들었고, 자아를 버리기 위해 코미디 수업을 듣거나 사진 촬영을 다니기도 했다. 심지어 액션스쿨 과정까지도 참여했다.

그리고 인생이 그렇듯 당연히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생겼다. 코로나가 왔다. 모든 일정이 스탑되거나 취소되었다.

그리고는 또 무슨 일이 있었나. 8년 6개월 만났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그 친구는 나의 친구이자 애인이자 조언자이자 나의 미성숙함을 견뎌주고 케어해줬다는 점에서 양육자이자 내가 다니는 회사 대표이자 하여튼 내 인생에서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한 사람이었다. 다쳤고, 몸이 더 안좋아졌다. 그간 남들은 직장을 다니며 차곡차곡 저축이라는 걸 할 때 글쓰기, 연기, 노래, 무용 등을 배우러 다니느라 얼마 모으지도 못한 돈 중에서 절반을 날렸다. 한 마디로, 관계/돈/건강을 잃었다.


나에게 있다고 믿었던 것들이 내 인생에서 빠져나가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이 오기도 했다. 너무나 무기력하고 정말 이대로 살면 큰 일 날 것 같다는 생각에 인생에서 처음으로 구직 활동이란 걸 시작했고, 걔 중에서 가장 까다롭게 사람을 뽑는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무엇보다 많은 걸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회사라고 생각되는 곳이다. 


나에게 잘 맞는다는 점에서 좋은 병원을 찾았다. 2년 가까이 도수 치료와 스테로이드 주사를 비롯한 온갖 비싼 주사 치료와 각종 기계 치료를 받았음에도 호전되지 않아 자포자기할 때에야 찾은 한의원이다. 12,400원짜리 자석 팔찌를 빌려주며 근본적으로는 울화가 많아 몸이 아픈 것이기에 '그러려니'하면서 살라고 조언하는 한의사 분이 계시는 병원이다. 


내 인생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 관계가 정리되니 외로움은 나의 몫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정말 내가 그렇게 원하지는 않는 인연들은 정리해야겠다는 용기가 생겼다. 그리고 그러다보니 정말 즐겁게 만날 수 있는 몇몇의 친구들이 생각났고, 또 정말 원하는 주제에 대해 떠들 수 있는 인연들도 우연히 새롭게 만나게 되었다.(가장 기대되는 건 예술인 돈공부 모임이다)


그리고 또 장기적인 관점에서 '연기'(내가 하고 싶은 일)를 생각하게 되었다.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흔히들 "10년만 해보고 안되면 때려친다, 시발!"하며 표효들 하는 업계에서, 그리고 당연히 10년을 다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업계에서 괴로워하느니 그냥 나는 10년 뒤에 다시 시작할 생각이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볼 계획이고, 그러기 위해 (원래도 하지는 않은 편이지만) 연기를 하고 있다는 의미 외에는 아무 의미 없는 소모적인 작업에 내 몸과 마음과 시간을 할애하지 않겠다.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이렇게 글을 다시 쓰게 되었다. 지금에만 쓸 수 있으면서 솔직하고 재미있고 씩씩하고, 하여튼 그런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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