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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요선 Feb 21. 2021

아주 두꺼운 팔뚝을 가진 나

예뻐지고 싶으면서도 예뻐지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나를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최근 ‘ㅋㅋㅋㅋㅋㅋㅋㅋㅋ’로 점철된 짤방을 하나 봤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마르지 않고 아름답지 않다고 여겨지는 모습을 한 여성이, 부연설명을 하자면 민낯에 안경을 쓰고 몸매를 드러내지 않는 옷을 입은 여성이 본인이 당한 몰래카메라 피해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터뷰의 캡처본이었다. 그러니까 '예쁘지도 섹시하지도 않은 여성'이 몰래 카메라와 같은 성범죄에 노출될 리가 없다는 조롱이 담긴 사진이었다.

이러한 맥락이 하나의 유머로 소비되는 장면들을 수도 없이 봐왔다. 성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것도, 나아가 성범죄를 당할 수 있는 것도 예쁜 여자만의 특권이지 너 같은 여자들은 아니라는 말, 여성에게 가장 모욕감을 줄 수 있는 방식이 외모를 비하하는 것이라는 믿음, 여성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외모로 그 인간을 품평하는 형태들은 크든 다르든 간에 어쨌든 여성을 대상화한다는 점에서 위와 맥락을 같이 할 것이다.

우연히 본 이 사진은 4년 전이었던 이십대 초반의 내가 겪었던 성폭력(성희롱) 사건을 기억나게 만들었는데 그 사건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수 많은 사건 중, 특히나 내가 했던 한 ‘실수’가 떠올랐다. 모욕 및 성희롱 관련으로 교내 성폭력상담센터에 가해자를 신고한 후, 6개월이 지나도록 인권교육수료와 같은 기본적인 조치들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교내 사이트에 이를 공론화하는 글을 작성하였다. ‘이게 무슨 성희롱이냐’부터 ‘여자들은 이렇게 마음이 약해서 안된다. 그러니까 취업이 안 되는 거다’라는 식의 댓글에는 논리적이기 위해 노력하며 하나하나 반박했었다.

내 버튼을 누른 건 엉뚱하게도 이런 댓글이었다. “못생긴 사람한테 못생겼다고 하고, 뚱뚱한 사람한테 뚱뚱하다고 하는 게 무슨 잘못이지?” 그 당시의 나는 그 댓글에 너무나도 흥분하여 “나 안 못생겼고, 안 뚱뚱하다. 너 얼굴이나 보고 싶다. 꼭 너랑 내 외모와 피지컬을 비교하고 싶다”는 투의 지극히 비논리적인 댓글을 전투적으로 달았고,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창피하다. 나는 왜 성적으로 대상화되었기 때문에 불쾌했던 일을 공론화하면서도 성공적으로 성적으로 대상화될 수 있는 여자로서의 모습을 갖췄음을 밝히고 싶어 했는지. 그 모순이 내내 걸렸다.

언젠가 사회에서 ‘여성’으로 ‘인정’받는다는 건 ‘너무 심하지 않은’ 정도의 성희롱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어떻게 보면 불쾌한 표현이고, 공격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말이지만 나는 이 말을 여성으로 승인받는 것 자체에 이미 ‘성공적으로 성희롱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또한 (칭찬을 포함하여) 성희롱을 받을 수 있을 만큼의 외모를 갖추되, 너무 심하게 성희롱을 받는다면 그 또한 그 여자의 책임이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줄타기에 성공하는 여자만이 ‘여자도 아닌 여자’와 ‘걸레’ 사이에 간신히 존재할 수 있는 것 같았다.그리고 나 역시도 이제까지 성공적으로 대상화되기 위해 노력한 부분이 있고, 어떨 때는 그 말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즐기기도 했음을 뒤늦게 인정했다.

늘 “누구보다 예쁘다/누구보다 예쁘지 않다”는 평가를 받으며 살아왔고, 유독 기억에 남는 경험들이 몇 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에 국회의원이 오는 날이었다. 그 국회의원에게 학교 안내를 하기 위해 각 반마다 한 명의 ‘여학생’이 발탁되었다. 그 당시에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동시에 내가 그 일원이 된 것이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대학교 때, 동아리 행사 뒷풀이에 한참 전에 졸업한 선배가 참석했다. 그 아저씨는 몇 명의 여자들을 자기 앞으로 불러 모았는데 그 역시 불쾌했지만 내가 그 자리에 앉아 있지 않다면 더 기분 나쁠 것 같다는 생각이 그 당시에는 들었다.

일곱 살 때부터 성차별주의자 친척 할아버지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항의하던 내가 불특정다수에게 ‘여성’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예뻐지고 싶으면서 예뻐지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십대 초중반까지를 지내왔다. 남자들에게 외모로 평가받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나를 여성으로 승인하지 않으면 기분이 나빴다. 이 자기모순적이고 분열적인 상황은 나를 정말 우스꽝스럽고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현재는 외모 권력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십대 초반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환경에 처해 있기도 하다. 적어도 내가 일하는 회사와 속해 있는 연극 집단에서는 외모로 품평당하는 일이 없다. 순전히 운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마르지 않은 내 몸을 혐오한다. 165cm에 50kg 미만이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얇지 않았던 내 팔뚝은 분명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나의 팔뚝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건 진짜 내 몸,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안경을 쓴 나를, 회장하지 않는 나를, 추레한 옷을 입은 나를 점점 나로 받아들였듯이 두꺼운 팔뚝을 가진 나를 언젠가는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 글을 쓰면서도 차라리 운동을 시작해서 살을 빼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말이다.


2018.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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