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쓸모없는 사람들이 아니오. 너희들이 먹는 빵을 만드는 사람일 뿐
1월 20일, 나는 트럼프 취임을 캘린더에 적어둘 정도로 기다려왔다. 우스갯소리지만 그 누구보다 트럼프 취임을 기다린다고, 트럼프 지지자라는 말도 했다. 이유는 내가 코인에 거의 내 전재산을 몰빵쳤기 때문이다. (전재산이 얼마 안 된다)
코인의 기술적 가치 잘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교환가치를 가진 화폐로서 기능할 것이라는 것도 그냥 그런 날이 오나 보다 싶다. 내가 코인에 몰빵한 이유는 '돈을 더 빠르게 벌고 싶기 때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래서 비트코인보다 알트코인 비중이 훨씬 높다. 오로지 유동성과 이벤트로만 움직이는 밈코인에도 많이 들어가 있다. 비트코인 자체 큰 이벤트인 반감기와 코인을 미국의 전략 자산으로 활용하겠다는 트럼프 취임까지 맞물려 흔치 않을 기회일 것으로 예상하여 배팅한 것뿐이다.
비교적 단기간에 근로소득을 빠르게 올렸다. 나 혼자 살기에는 충분한 소득이라 생각한다. 덕분에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있다. (고가의 물건이나 여행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라 가능하다.)
나는 주로 배우는 것에 제일 많이 쓴다. 지난 7년간 덕분에 원 없이 배웠다. 웬만한 문창과 학생과 연기과 학생들보다 더 많은 수업을 들었다 자부한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처한 환경(?)에도 비교적 만족하는 편이다. 이만하면 잘 풀렸다고 생각한다. 크고 좋은 집에 대한 로망도 별로 없다. 물론 이것들은 전부 내가 '미리 포기한 것'일 수도 있지만 진심으로 자격지심을 느끼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더 빠르게 많이 벌고 싶은 이유는 내가 근로소득 외에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무리한 레버리지와 과도한 투자 수익을 바라는 것 역시 가진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엄마가 사둔 성수의 아파트'에 혼자 살거나 월급은 전부 저축하고 '아빠 카드'로 생활비를 쓴다는 직장 동료들을 볼 때마다 근로소득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갭을 매번 실감한다. 이들은 비교적 늘 더 여유롭게 자기 계발에 힘쓰고 푼돈에도 연연하지 않는다.
동시에 내가 몰빵한 코인이 5배 간다 해도 내 인생이 바뀔 일이 없다는 것역시 잘 알고 있다. 설령 10배가 간다 해도 성수의 아파트에는 살 수 없으리라.
사실 지금, 난리다. 한국 상황도 그렇지만 트럼프 같은 사람이 미국 대통령에 재선 된 것만 봐도 그렇다. 사람들은 매일같이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찾기 위하여 시위를 하고 있다. 올바름과 윤리와 다양성과 빈곤에 대해 지치지 않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우리가 신자유주의 체제를 넘어 다른 상상을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다른 상상력의 가능성에 대해 호소한다.
나는 그럴 때마다 어딘가 불편해진다. 그 부채감을 일시적으로나마 덜기 위하여 나는 장애단체에 여성단체에 농민단체에 전태일 의료센터에 '소액'을 후원한다. 가끔 시위에도 참여하고, 활동에도 참여한다. 예술지망생 호소인이던 20대 중반에 그토록 혐오해 마지않던 '부동산 이야기만 내내 하는 30대 모습까지는 아니지 않냐면서' 자위하는 거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에 목을 매는 이유는 한국에서는 개인의 자산이 거의 대부분 부동산에 몰려있기 때문이며 다른 대안적인 사회안전망이 없기 때문이다. 혐오할 일도 아니다. 게다가 내가 부동산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이유는 내가 덜 세속적이어서가 아니라 그만한 자본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일 뿐이다.
"우리는 쓸모없는 사람들이 아니오. 너희들이 먹는 빵을 만드는 사람일 뿐."
이 문장을 사랑하면서도 쓸모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싶지 않다. 내 쓸모를 '입증하고' 싶고, 그 입증의 방식은 자본주의의 방식으로 귀결된다. 나 역시 결국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거다. 이전에는 그게 근로소득을 올리는 방식이었다면 근로소득의 한계가 있음을 절실히 깨닫고 다른 방식을 시도하는 것뿐이고.
내가 정말 이번에 빠르게 돈을 벌 수 있을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 고래니 세력이니 하는 놈들은 개미까지 다 데리고 돈을 벌지 않기 때문이다. 트럼프 이름을 딴 밈코인이 나오자마자 30조 가치가 매겨져 기술력을 갖추었다고 '믿어지는' 가존 알트코인들의 유동성이 다 빨린 것만 봐도 그렇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상상을 해야 할 텐데, 사실 그게 맞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쓸모 있는 사람으로 여겨져 돈을 많이 벌고 싶고, 동시에 빈곤에 대해서도 옹호하고 사유하고 싶다. 그렇지만 내가 빈곤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이게 솔직한 마음이다.
2011년 월가 시위 지젝의 선언문을 보며 진심으로 가슴이 뛰면서 동시에 나도 사실은 '저들이' 되고 싶은 건 아닌지. 이 분열이 나를 어디로 데려다 줄 것인지 나도 궁금하다.
그들은 우리를 패배자라고 말하고 부른다. 그러나 진정한 패배자는 월스트리트에 앉아 수십억에 달하는 우리 돈으로 구제금융을 받아먹은 그들이 아닐까? 그들은 우리가 사회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미국에는 부자들을 위한 사회주의가 있다. 그들은 우리가 사유재산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2008년 금융 붕괴를 초래한 월스트리트의 투기는 힘들게 모은 사유재산을 날려버렸다. 우리가 이곳에서 밤낮으로 날려버린다고 해도 그보다 더 많이 날리지는 못할 것이다. 수천 채의 집들이 빚으로 넘어간 것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우리가 몽상가라고 말한다. 진정한 몽상가는 모든 것이 지금까지의 방식대로 무한정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치들이다. 우리는 몽상가가 아니다. 우리는 악몽으로 변해버린 꿈에서 깨어나고 있다.
체제가 어떻게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는지 목도하고 있을 뿐이다. 고전 만화의 한 장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고양이는 절벽에 다다랐지만, 발 밑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걷는다. 밑을 내려다보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비로소 추락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여기서 하고 있는 일은 바로 저기 월스트리트에 있는 친구들에게 "이봐, 아래를 봐!"라고 일깨워주는 것이다.
2011년 4월 중반, 중국 정부는 대안적 현실이나 시간여행을 소재로 삼은 TV, 영화, 소설 등을 금지했다. 사람들이 여전히 대안을 꿈꾸기 때문에 금지해야 했다는 면에서 이는 중국에 좋은 징후다. 그러나 서구 사회의 우리는 금지가 필요 없다. 이미 지배체제가 우리가 꿈꿀 능력마저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늘 보는 영화를 생각해 보라. 세상의 종말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종말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공산주의 시대의 오래된 농담이 하나 있다. 동독 노동자 한 사람이 강제 부역에 동원되어 시베리아로 떠났다. 모든 우편물이 검열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암호를 정하자. 만약에 내 편지가 파란 잉크로 쓰여졌다면 모두 사실이고, 편지가 빨간 잉크로 쓰여졌다면 그것은 거짓이야." 한 달 후 친구는 그의 첫 편지를 받았다. 모두 파란색으로 쓰여 있었다. "여긴 모든 것이 완벽해. 가게에는 좋은 음식들로 가득하고, 극장은 서구의 좋은 영화들을 보여줘. 아파트는 크고 호화스럽지. 그런데 딱 하나 여기서 살 수 없는 것이 빨간 잉크야."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온 방식이다. 우리는 원하는 자유를 모두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딱 하나 없는 것이 바로 빨간 잉크, 즉 우리의 비非자유를 또렷이 표현할 언어다. '테러와의 전쟁'처럼 우리가 자유를 말하도록 배운 방식은 자유를 왜곡한다. 그리고 이것이 이곳에서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일이다. 여러분이 우리 모두에게 빨간 잉크를 나눠주고 있다.
한 가지 위험이 있다.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지 마라. 우리는 여기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기억하라. 축제는 싸구려가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로 돌아간 그다음 날이다. 그때에도 변화가 있을까? 나는 여러분이 오늘을 회상하며, "그래, 우리는 젊었었지. 아름다운 날이었어."라고 말하길 바라지 않는다. 우리의 기본적인 메시지는 '대안을 생각하는 게 가능해졌다'는 것임을 기억하라. 이 규칙이 깨어진다면 우리는 최선의 가능한 세게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정말 어려운 물음들이 우리를 마주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사회 조직이 자본주의를 대체할 수 있을까? 어떤 새로운 지도자를 원하는가?
기억하라. 문제는 부패나 탐욕이 아니다. 체제 그 자체가 문제다. 그것은 사람들을 부패하게 만든다. 적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위에 물타기를 하기 위해 행동에 돌입한 가짜 친구들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카페인 없는 커피, 알코올 없는 맥주, 지방 없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투쟁을 무해한 도덕적 저항으로 만들고자 할 것이다. '디카페인' 시위로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콜라 캔을 재활용하고, 자선단체에 몇 달러를 기부하고, 수익금의 1퍼센트가 제3세계의 굶주리는 아이들에게 돌아간다는 스타벅스 카페라테를 사 마시며 흐뭇해하는 세상은 이미 충분히 겪었기 때문이다. 노동과 고문을 아웃소싱하고 결혼정보업체가 우리의 사랑을 아웃소싱하게 된 이후, 우리는 오랫동안 정치적 참여 역시 아웃소싱되도록 내버려 뒀다. 이제는 되찾아야 한다.
공산주의가 1990년에 붕괴된 체제를 가리킨다면,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그 공산주의자들은 오늘날 가장 효율적이고 무자비한 자본가들이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오늘날 중국은 미국보다 훨씬 더 역동적인 자본주의를 가졌지만,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필요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본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민주주의에 반대하고 있다는 협박을 당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혼은 끝났다. 변화는 가능하다.
오늘날 무엇이 가능할까? 언론을 보자. 한편으로는 기술과 섹슈얼리티에서 모든 것이 가능해 보인다. 달을 여행할 수 있고, 유전자공학으로 영생을 누릴 수도 있으며, 동물이나 그 무엇과의 섹스도 가능하다. 하지만 사회와 경제 영역을 보라. 거의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부자들의 세금을 약간 인상하고자 하면 그들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경쟁력을 잃을 것이란 이유로 말이다. 의료보험료를 인상하고자 하면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불가능하다. 그건 전체주의 국가가 되는 길이다." 영생을 약속하면서 의료보장을 위해선 한 푼도 쓸 수 없다는 이 세상은 무언가 잘못됐다. 우리는 여기서 우선순위를 바로 정해야 한다. 우리는 더 높은 생활수준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더 나은 생활수준을 원한다. 우리를 공산주의자라고 한다면, 그 유일한 이유는 우리가 공동의 것 the commons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공동의 것, 지적 재산에 의해 사유화된 공동의 것, 유전공학의 공동의 것. 이를 위해, 오직 이것만을 위해 우리는 싸워야 한다.
공산주의는 확실히 실패했지만 공동의 것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가 미국인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들이 진짜 미국인이라고 주장하는 보수 근본주의자들이 상기해야 할 것이 있다. 기독교란 무엇인가? 그것은 성령이다. 그럼 성령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서로 사랑으로 맺어지고 오직 사랑을 위해 자유와 책임을 지닌 신앙인들의 평등적 공동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령은 지금 이곳에 있다. 그리고 저기 월스트리트에는 불경스런 우상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이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심이다. 단지 내가 걱정하는 것은 우리가 집으로 돌아간 후 일 년에 한 번쯤 만나 맥주를 마시면서 향수에 젖어 이 날을 회상하는 것이다. "그때 우리 정말 좋았지." 그렇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하자. 사람들은 종종 무언가를 갈망하지만 진정으로 원하지는 않는다. 갈망하는 것을 진정으로 추구하길 두려워하지 마라.
슬라보예 지젝, 2011년 10월 9일, 뉴욕 주코티 공원
-슬라보예 지젝(주성우 옮김, 이현우 감수),《멈춰라, 생각하라》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