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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간의 운영을 끝으로 태화목욕탕이 문을 닫습니다

세상에는 딱 한 번만 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

by 백요선

세상에는 딱 한 번만 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 1월 31일에 문을 닫는 태화목욕탕이 그렇고, 그 전날 밤에 다녀온 재인의 집이 그렇다.


1월 27일 밤 11시. 나는 목욕탕에 가고 싶어졌다. 춤추는 친구가 냉탕과 온탕을 들락거리는 게 몸에 얼마나 좋은지 아냐며 단식 효과가 있어 제니도 한다는 말을 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몸에 좋든 말든 상관없이 단식 효과가 있든 말든 내 몸을 찬 물에 던져버리고 싶고, 다시 뜨거운 물에 빠져버리고 싶었다.

신기한 건 이전에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가 하필이면 1월 27일 밤 11시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뿐이다.


나는 맹렬하게, 아주 맹렬하게 24시 사우나를 뒤지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에는 두 개의 사우나가 있다는 사실도 그때 알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두 곳의 후기가 심각하게 처참했다. 오래되고 낡은 건 상관없는데 천장 구석구석 곰팡이가 피어있고, 이상한 눈을 한 아저씨가 마루에 버티고 있다는 곳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범위를 넓혀 보았다. 여차하면 택시라도 타고 갈 기세였다. 갑자기 목욕탕을 가기 위해 택시를 타겠다고 마음먹는 게 이상해 보일 수 있겠으나 나는 한 번 꽂히면 끝을 봐야 한다.

그날이 하필 그랬다.


그런데 생각보다 오래되고 낡았지만 깨끗한 목욕탕이 세상에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리미엄 사우나나 럭셔리 스파까지 찾아보게 되었고, 24시간 운영하는 곳을 찾지 못해 그만두었다. 그리고 어렵게 어렵게 오래되고 낡았지만 깨끗한, 동네 주민들이 어렸을 적부터 드나들어 정겨운 추억이 묻어 있다는 태화목욕탕을 발견했다.


다음날 나는 태화목욕탕을 기쁜 마음으로 찾아갔다. 그러다 결제를 하면서 그토록 어렵게 찾은 태화목욕탕이 28년간의 운영을 끝으로 1월 31일에 문을 닫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월 31일까지만 하시는 거예요?"

처음 가는 주제에 뭔가 아쉬워 재차 확인했다.


그렇게 들어간 태화목욕탕은 어렸을 적 해남에서 할머니와 다녔던 목욕탕과 비슷했다. 정겹다는 말이 놀랍도록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아이스커피를 시킬지 매실차를 시킬지 고민했지만 결국 사 마시질 못했다. 자리를 비운 아주머니를 찾아 이곳저곳을 누빌 너스레도 없었고, 목욕탕 안에서 음료를 어떤 방식으로 마셔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내가 모르는 것을 하고 싶지 않다.


어렸을 때는 할머니와 함께 목욕탕에 다녔다. 나는 목욕탕에 들어설 때마다 넘어져 머리가 깨지는 상상을 했다. 할머니는 내 때를 아주 사정없이 박박 문질렀는데 어떨 때는 피부 살갗이 벗겨진 적도 있었다. 뜨거운 탕에 들어갈 때는 내가 벌을 받고 있다는 생각도 했다. 이 뜨거운 탕 안에서 버텨야 한다고, 나이가 먹을수록 더 버틸 줄 알아야 한다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그 인고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할머니는 나에게 바나나 우유를 사주었다. 쭈글쭈글해진 양손으로 바나나 우유를 잡고 마셨다.


오늘은 혼자다. 나는 친구가 알려준 대로 냉탕과 온탕을 들락거렸다.

온탕은 이제는 생각보다 뜨겁지 않았다. 내 나이만큼 인내심을 기른 것만 같았다.

냉탕은 생각보다 더 차가워서 놀랐다. 천천히 발을 담그고, 계단을 한 칸 더 내려가 하반신을 전부 물에 담갔다. 그럼에도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물속으로 온몸을 아주 내동댕이치고 싶다는 바람과는 달리 아주 잠깐 몸을 잠갔다 뺐다. 나이에 맞게 아주 간사하고 치졸한 몸놀림이었다.


그리고 다시 온탕.

전신이 찌릿찌릿하다. 이 느낌이구나. 혈관이 수축하고 팽창하고 날뛰는 게 절로 느껴진다.

살아있는 것 같다. 왜 이제야 왔는지. 앞으로는 자주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태화목욕탕은 며칠 뒤면 문을 닫는다. 처음 온 주제에 태화목욕탕이 벌써 그리워지려 한다. 어쩌면 그리워할 대상을 찾고 있는지도.


"오빤 진짜 내 스타일이 아니야. 나는 착한 남자 좋아해."

"누가 뭐래?"


그러게.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나는 재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도 재인의 집에 한 번 더 다녀왔다. 그다음 날에는 태화목욕탕에도 한 번 더 다녀왔다.


그렇지만 오늘은 1월 31일이다. 나는 다시는 그곳들에 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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