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 같다
병원을 '또' 옮기게 되었다. 맨 처음 정신과라는 걸 두근대는 마음으로 방문해 본 건 약 5년 전 경미한 공황증세 때문이었다. 그 뒤로는 술을 먹고 사고를 치면 자기처벌하는 마음으로 간간이 정신과를 찾았다. 블랙아웃이 반복될 때는 풀배터리 검사도 해보고, 심리상담도 받아보았다.
이곳저곳 병원을 다니다 말다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내 진단명은 달라졌다. 종합 주의력 검사 결과 ADHD는 아니라 했는데 어디서는 순간 집중력과 지능이 좀만 좋아도 검사를 피해 갈 수 있으니 나는 ADHD라 했다. 어디서는 경계성 성격장애가 의심된다 했고, 어디서는 절대 아니고 오히려 경계성 성격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양육된 케이스 같다고 했다.
이제 나는 '풀배터리 검사 결과 조울증을 진단받았으나 당시에는 이러한 이슈가 있었던 거지 병리적으로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아요. 애착 문제가 있고 충동 조절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어엿한 정신과 내담자가 되었다.
사실 8개월 정도 동네 병원 잘 다니면서 꾸준히 약을 복용하고 있었는데 그 의사가 커뮤니티에 저질스러운 댓글을 달고 다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병원을 옮길 수밖에 없어 나는 좀 짜증이 나 있었다. 최근 나의 애착 트리거가 건드려진 경험도 불안감 조성에 한몫했다. 작년 내내 굉장한 우울함과 무기력함으로 고생을 했던 지라 또 그런 상태가 될까 봐 두려웠다. 그럴 때는 정말이지 '내가 완연한 정신병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숨 죽이고 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년의 여자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알콜로 인한 문제는 어떻게 멈추게 되셨나요?"
"그냥 그런 성격이라 그런 거 같으세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초중고대학 다닐 때는 어떠셨어요?"
"왜 그런 사람들한테 끌리세요?"
나는 답했다. "알콜로 인한 문제는 할 만큼 해서 멈춘 것 같다, 예전에는 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기질적인 문제가 맞는 것 같다, 초중고대학 때를 생각해 보니 더욱 그렇다, 늘 나보다 상대의 마음이 어떤 지가 더 중요하고 그게 나의 애착 문제의 핵심인 것 같다"라고.
언젠가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개인의 일탈이나 결함이 아니라 뇌 또는 호르몬의 문제 내지는 타고난 기질의 문제라는 걸 더 일찍 알았더라면. 치료와 상담으로 개선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10대와 20대를 그렇게 통째로 날리지는 않았을 텐데. 존나 억울하다고.
기질이든 성격이든 하여튼 타고나길 예민하고 충동감도 크고 무기력감과 공허감이 큰데 이거 어떻게 살아가냐고. 그런 생각이 드니까 눈물이 나왔다. 나는 멋쩍게 울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활짝 웃었다.
"다들 할 만큼 해도 해도 안 멈춰지니까 문제인데 멈췄다니 다행이네요. 그냥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예전에는 기분에 끌려다녔다면 지금은 그냥 타고 간다고. 그런 기질이 주는 즐거움과 덕목도 있으니까요. 이건 그냥 공무원은 죽어도 못하는 기질인 거예요. 본인한테 맞는 환경 잘 찾아가서 일도 하고 글도 쓰고 연기도 하는 거거든요."
선생님이 보시기에 약은 필요 없을 것 같냐고 물었다. 불안했기 때문이다. 정 불안하면 기본적인 항우울제를 비상약으로 가지고 있게끔 처방해 준다고 하셨다.
"20대 때 엄청 방황하셨을 거 같아요. 그러다 본인 우울도 들여다보고, 검사도 하고, 상담도 하면서 30대 초반부터 좀 정리가 되셨을 거고요. 앞으로도 갑자기 안정적이게 되고 좋아질 거라고는 말 못 하지만 그 기질을 받아들이고 더 즐기게 될 수는 있을 거예요. 정 안 되겠다, 힘들다 싶을 때 약 드시면 되죠, 뭐."
이 말을 들으니 덕분에 좀 진정이 되었다.
저항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은 애초부터 저항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저항하고자 했기 때문에 비로소 "그냥, 받아들임"이 가능해진다.
나는 이제야 좀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 같다.
더 좋아질지는 모르겠다. 즐길 수 있게 되기를 하고 바랄 뿐이다.
+ 초진비로 67,000원이 나왔다. 최근 점성술 비용보다는 덜 들었다^^
정신을 한 번 놓은 대가가 이러하니 정신을 놓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