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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필요한 불편함

잊지 않기 위해 필요한 이야기

by 요리하는유리

과거의 좋지 않은 기억을 뇌가 무의식적으로 잊는 것을 동기화된 망각 (motivated forgetting)이라고 한다. 내가 가진 최대의 장점이자 단점을 꼽자면 바로 이 동기화된 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괴로웠던 일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쉽게 잊어서, 가끔 예전에 알고 지냈던 지인들이 내가 저질렀던 창피할 만한 이야기를 할 때 정말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아 당황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고된 일은 오래 곱씹지 않고 꿀꺽 삼켜 그대로 배출하는 내 뇌의 신진대사는 너무나 활발하다.


세상을 편하게 사는데 이보다 더 좋은 능력도 없겠지만, 힘들었던 일들을 기억하는 건 생존에 꼭 필요하다. 음식을 잘못 먹고 배탈이 난 후로 한동안은 그 음식엔 눈길도 주지 않는 것처럼,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은 피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건강하게 먹는 습관을 들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왜 잘 먹으며 살기로 했는지, 그렇게 하기 위해 왜 채식을 시작했는지를 깜빡 잊고 다시 예전의 식습관으로 쉽게 돌아갔을 것이다. 그만큼 지금의 나는 과거에 내가 얼마나 불편하게 살았었는지에 대한 세세한 기억을 많이 잊고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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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화된 망각의 전제 조건은 고통스럽거나 불안을 야기하는 기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구워진 케이크의 망한 부분을 제일 먼저 잘라내서 예쁜 부분만을 남기는 것처럼, 나의 뇌는 한 때 어떤 이유로 고생했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 괴로웠던 날들은 세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거슬리는 장면들은 온데간데없고 내 예전 기억들엔 그저 고생했구나 하는 잔상 정도만 어렴풋이 남아있을 뿐이다. 몇몇 사람들은 내가 건강으로 고생했다고 하면 큰 병에 걸렸다거나 사고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내겐 병 대신 만성 질환이 있다.


만성 질환은 큰 병에 걸리는 것 못지않게 정말 끔찍하다. 하지만 너무 흔해서 사람들이 보통 ‘뭐 그 정도 가지고’ 하고 넘어갈 만한 질환이 내게 너무 많다. 우리는 병에 ‘걸린다’고 하는데 종신병이 아닌 이상 병은 걸리면 ‘회복하는’ 끝이 있게 마련이다. 반면 질환은 ‘겪는’ 것이고 종료 시점이 없어서 더 무섭다.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그리고 같은 질환을 겪고 있다고 해도 개인마다 다른 증상에 다 이해할 수 없어서 나만 온전히 겪는 그런 사소로운 불편함이 정말 싫었다.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쉽게 볼 수 있는 질환 중 하나가 자가면역질환인 아토피, 비염, 천식, 한포진, 알레르기 등이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아도 주변에 한 명쯤은 가지고 있고, 길을 지나다녀도 끊임없이 재채기를 하는 사람 혹은 빨갛게 일어난 아토피 피부염을 가진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5분간은 끝없는 재채기에 시달렸고, 팔과 다리 접히는 부분, 살갗이 얇은 몸 여기저기에 아토피가 올라와 내 몸을 세상으로부터 숨기고 싶었던 십 대 시절을 보냈다.


이런 만성 질환 때문에 재채기를 하고 피부가 간지러운 건 누구에게 아프다고 설명하기도 어렵다. 재채기를 너무 오래 해도 그저 좀 긴 재채기려니, 피부염도 통증이 아니니 버틸만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렸을 때 도저히 긁지 않을 수 없게 참을 수 없어서 아토피가 올라온 부분을 벅벅 긁고 있으면 가족들 중 한 명은 ‘그걸 좀 참지 왜 또 긁느냐’라는 눈치나 핀잔을 주기 일쑤였다.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멈추지만 계속되는 간지러움에 울고만 싶었다. 나는 잘못이 없는데, 왜 내게 뭐라 하는 걸까 생각했다. 그 불편함은 겪어본 사람이 아니라면 전혀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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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성 질환은 아픔이 아닌 불편을 동반한다. 재채기도, 간지러움도 통증으로 간주하기엔 너무 자질구레하다. 카페에서 커피를 계산할 때 손에 올라온 발진이 마음에 걸려 조금은 위축된다 거나, 재채기를 너무 심하게 해서 주변의 시선을 사는 일들은 그저 일상생활에 불필요한 불편을 더할 뿐이다.


그렇다고 꼭 나처럼 아토피나 비염이 있어야만 불편을 느낄 수 있는 건 아니다. 건강하지 않아서 불편은 다양한 모습으로 개개인에게 찾아온다. 어떤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형태의 불편을 겪을 수도 있다. 남들보다 더 피곤함을 느끼거나, 소화가 잘 되지 않아 고생하거나, 혹은 원인 모를 편두통이 이따금 있을 수도 있다. 병이라고 명명하기엔 부족한 자잘한 불편함이 모이면 나도 모르는 새에 불편의 역치가 올라간다. 그리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편하지 않은 내 몸의 상태가 기본값이 된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쓸데없는 불편들이 삶에 이미 너무 많이 녹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도 모르고 내 몸이 주는 작은 신호들을 놓치며 지내다 보면 그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정말 병에 걸릴 수도 있다. 서서히 불편의 역치가 너무 높아져서 정말 건강했던 때가 언제였는지, 어떤 느낌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상태가 된 나는 막 스무 살을 갓 넘겼었다. 더 이상 불편을 참을 수 없어서, 내 건강한 모습을 찾기 위해 시작한 십 년간의 여정이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나를 채식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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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에 대한 애정과 채식을 향한 회의감을 완전히 무너뜨린 건 쓸모없는 불필요함을 위해 꼭 필요한 불편함을 완전히 마주했을 때였다. 손가락을 쪽쪽거리며 먹던 과자의 성분 표시를 읽고, 매콤한 양념에 버무리는 닭이 어디서 무엇을 먹고 자라 내 입에 들어오는 건지 알게 되었을 때 내 몸의 불편함이 처음으로 마음에 전해졌다. 그제야 나의 편안한 삶을 위해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알아야만 하고 실천해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


채식주의자가 하는 채식에 대한 이야기가 육식을 하는 사람들에게 불편할 수 있다. 이 이야기를 하는 나 역시도 한 때 채식은 생각할 수 조차 없던, 육식을 너무도 사랑하던 사람이었어서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조금은 거북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건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삶에 득 될 것이 없는 불필요한 불편함을 완전히 잊기 전에 내게 너무나 필요했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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