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사는 법을 배우다

by YOROJI

느림보

29년 동안 한국인으로 살아온 내게, 이곳은 모든 것이 느리게 느껴졌다. 투어 버스 아저씨는 정시에 출발하지 않고 늦은 사람을 기다려 주었고, 학생 비자를 받기 위해 아일랜드 이민청 바닥에 앉아 하루 종일 기다린 적도 있었다. 주말 내내 물건 픽업 서비스를 기다리다 결국 월요일이 되어서야 받을 수 있었고, 아일랜드 트램인 LUAS는 수시로 멈추거나 느릿하게 움직였다.(그 느린 LUAS로 인해 추후에 큰 은혜를 입게 되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느린 곳이었다. 처음 한 달 동안은 답답해서 눈물이 나고,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들에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한국에서의 쾌적한 서비스들이 자꾸 그리워졌다.

스크린샷 2025-10-26 오후 8.28.04.png 구글 평점 1.9에 빛나는, 아일랜드 국립 이민청. 그 별점 속엔 수많은 외국인의 한숨이 담겨 있었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모든 것이 느리고 답답한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국 나도 내 속도의 페달을 조금 늦춰야 했다. 이곳에서는 어떤 일도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사소한 일 하나에도 시간이 걸렸다.

한동안 스트레스를 받았었는데, 마음을 다르게 먹으니 오히려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감감무소식의 공공기관 서비스에 속이 타기보다는 옆자리의 아일랜드 할머니와 스몰 토크를 나눴고, 약속에 늦는 친구들을 멀뚱히 서서 기다리는 대신 나를 위한 쇼핑을 즐겼고, 빨리 나오지 않는 식사 메뉴를 눈 빠지게 기다리기보다 친구들과 수다를 떨며 시간을 보냈다. 타의에 의해 찾아온 여유였지만, 그 느림 속에서 나는 조금씩 이곳의 리듬에 적응해 갔다.


오히려 좋아

처음에는 답답하게만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나중에는 오히려 기분 좋은 여유로 바뀌었다. 어쩌면 우리는 모든 것이 빠른 대한민국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늘 긴장하며 살아왔던 게 아닐까.

이곳에서 조금 느리게 살아가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닫혀있던 나의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그럴 수도 있지, 느릴 수도 있지' 하는 생각이 자리 잡자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이 늘었다. 느리게 산다는 건 생각보다 괜찮은 일이었다.

놀랍게도 마음을 편히 먹으니, 아일랜드의 변화무쌍한 날씨에도 대응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비가 오고, 해가 뜨고, 다시 흐려져도 그냥 그러려니 하며 비를 맞았다.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놀랍게도 조금씩 긍정적으로 바뀌어 갔다.


LUAS에서 입은 은혜

어느 날, 학원 수업을 마치고 LUAS를 타고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그날따라 사람이 많아 서서 가던 나는 숨이 막히듯 어지러움을 느끼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좌석에 앉아 있었고,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유일한 동양인인 나를 걱정스럽게 둘러싸고 있었다. 그 언제나 느리던 LUAS는 도로 한가운데서 멈춰 있었고, 아무도 불평하지 않은 채 내가 깨어나길 함께 기다려주고 있었다. 나를 옆에서 돌봐준 아일랜드 아주머니는 이름도, 사례도 남기지 않은 채 그저 나를 무사히 집 앞 정류장에 내려주셨다. 정류장에는 아일랜드 아빠가 마중 나와 있었고, 그는 "긴급 상황으로 열차가 일시 정차 중입니다"라고 적힌 전광판을 사진으로 찍어 보여주셨다. 바쁘지만 느리게 사는 사람들. 그 느림 속에 숨어 있던 따뜻한 마음에 그날 진심으로 감사했다. 나는 그날 비로소, 온갖 이유로 느리게 달리던 LUAS를 이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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