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도를 기다리며
드라마 1화, 북콘서트장에서 경도가 지우에게 외워 들려주는 추사 김정희의 '도망시'. 유배지에서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쓴 이 시를 듣고 지우는 눈물을 흘립니다. "그 사랑이 너무 슬프다"고요. 많은 분들이 이 장면을 보며 예감했을 겁니다. '아, 이 드라마는 비극으로 끝나는구나. 지우와 경도도 결국 만날 수 없게 되는 거구나.' 맞습니다. 도망시는 결과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한 그 예언이 아닙니다. 이 시가 예견하는 건 '만날 수 없는 비극'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으면 만날 수 없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세 개의 '기다림'을 비교해야 합니다. 추사의 기다림, 고도의 기다림, 그리고 지우의 기다림을요.
도망시를 보죠. 추사에게 아내는 죽음 때문에 닿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천리 밖에서 입장을 바꿔 다시 태어난다면 내 슬픈 마음을 알 거야"라는 구절은 절대적 단절을 보여줍니다. 귀향때문에 아내의 죽음을 보지 못하고 헤어졌습니다. 더이상 아내와 만남은 객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더 이상 오해도 상처도 없는, 오직 그리움만 남은 사랑입니다. 이것이 도망시가 보여주는 사랑의 순도입니다. 추사의 비극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아무리 원해도, 아무리 애써도,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제 추사의 사랑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죠. 시간속에 굳어버려서 마침내는 감정의 형태로만 남은 화석이 되어버렸습니다. 사랑이 도착한 가장 낮은 자리, 이보다 더 내려갈 수 없는 감정의 바닥입니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는 애초에 오지 않도록 설계된 존재입니다. 기다림 자체가 목적이지, 만남은 설계되어 있지 않습니다. 극중 인물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계속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왜일까요? '기다림'이라는 말은 참 묘하죠. 끝났다는 선언을 미룹니다. 가능성 하나를 불씨처럼 붙잡거든요. 그리고 아직 도망자가 되지 않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겁니다.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라는 말은 공허하고 무섭기까지 하죠. 그래서 우리는 말합니다. 선택하지 않은게 아니라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고도를 기다린 사람들이 그런거죠. 기다림이라는 말은 도망이라는 것에 이름을 붙여주고 회피하는 것에 이유를 만들어 주고 그 자리에 머무는 일을 조금은 견딜 수 있게 해주거든요. 그래서 기다림이라는 말뒤에 숨는 겁니다. 고도의 비극은 추사와 닮았습니다. 그리움은 확실한데 만남은 처음부터 허락되지 않습니다. 추사는 사랑을 잃었고 고도는 애초에 오지 않습니다. 하나는 죽음이후의 사랑이고, 하나는 존재하지 않기로 정해진 기다림입니다. 그래서 남은건 사랑이 아니라 감정만 남은 상태죠. 사랑이었던 감정뿐입니다. 그런데 지우는 다릅니다.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경도는 죽지 않았습니다. 경도는 사라지지도, 떠나지도 않았습니다. 경도는 늘 거기 있습니다. 다만 지우의 마음이 아직 건너지 못하는 거리에 있습니다. 지우가 심리적으로 도달하지 못한 것뿐입니다.
지우가 도망시를 듣고 울었던 장면. 어떻게 보셨나요? 가장 뭉클하면서도 아름답던 장면 아니었나요? 단순하지 않습니다. 지우는 추사처럼, 타는 목마름으로 고도를 기다리던 사람들처럼, 자신도 그들과 같은 자리에 있다고 느낀 겁니다. 단지 시가 슬퍼서 운게 아닙니다. 추사나 고도가 갖고 있는 그 감정의 가장 낮은 자리.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다는 사실만 남은 곳, 사랑이 그리움으로만 남는 바닥. 지우가 바로 그 자리에 서 있다는걸 말하는 겁니다. 아마도 지우가 갖고 있는 상처가 그만큼 아프고 크다는거겠죠. 하지만, 지우가 스스로에게 만들어낸 착각입니다. 지우에게 만남이란 단순히 곁에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의 내가 이 사랑을 감당할 수 있는가, 스스로를 통과시키는 일이거든요. 혈육인 엄마로부터 미움을 받으며 자라고 혼외자라는 정체성에 상처받은 지우는 아마도 자기자신에게 허락을 하지 않는것으로 보여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것을요. 사랑 앞에서 발을 내딛지 못합니다. 책임이 두렵고 그 무게에 눌릴까봐 무섭구요. 경도는 지우곁에 있지만 지우는 경도를 이미 만날 수 없는 사람처럼 멀리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물리적으로 추사나 고도와는 다르지만, 스스로가 추사나 고도와 같은 상태인겁니다. 그래서 지우의 사랑은 추사처럼 "잃어서 못 만나는 사랑"이 아닙니다. "아직 자신이 받아들이지 못해서 만나지 않는 사랑"인 겁니다. 그래서 지우의 기다림도 고도의 기다림과 닮지 않죠. 오지 않을 누군가를 기다리는게 아니라 지금의 나로도 사랑해도 괜찮다고 자신에게 말해줄 그 한 순간을 기다리는 겁니다.
추사는 죽음 때문에 만날 수 없습니다. 고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만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우는 선택하지 않기 때문에 만나지 않습니다. 지우는 심리적인 동일시가 있었겠지만, 그건 지우가 만든 방어기제이고 착각이었던거죠. 이 차이가 결정적입니다. 추사와 고도의 기다림은 어찌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미 닫혀버린 문앞에서 시간만 흘러갈 뿐입니다. 기다림은 운명일뿐이고 다른 선택이 허락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지우의 기다림은 달라요. 문은 아직 열려있고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지우에게 기다림은 운명이 아니라 선택인겁니다. 끝낼 수도 있는, 다만 아직 건너지 않기로 결정하고 있을 뿐이죠. 지우는 실제로 만날 수 있는 절절한 사랑 앞에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추사와 고도와 같은 자리에 놓고 있는 겁니다. 자기 선택을 운명처럼 포장합니다. "어쩔 수 없어", "만날 수 없는 게 맞아"라고 스스로를 설득합니다. 왜냐하면 상처뿐인 지우는 그렇게 하면 덜 아프니까요. 그래야 자신의 떠남이 '비겁함'이 아니라 '운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의 제목이 사실 역설적이에요. 떠나는건 지우인데, 왜 그 지우가 ‘경도를 기다리며’라고 하느냐죠. 어쩌면 이제 사랑을 하려고 하는 지우를 두고 경도가 떠나버리게 되고 그 경도를 지우가 기다린다고 하는 것도 가능하겠죠. 드라마니까요. 조금더 한발 지우의 심리로 들어가보면 이 제목은 문자적으로만 보면 안됩니다. 지우가 자기 자신에게 붙인 말, 그 마음을 옮겨놓은겁니다. ‘경도를 기다리며’ 그 진짜 뜻은 경도를 향한 시간이 아니라, 아직 선택하지 못한 나를 하루 더 견디는 말인겁니다. 포기도 결정도 아닌 채 지금의 나를 버티게 해주는 변명같은거죠.
하지만 중요한 사실, 희망과 해피엔딩을 생각할 수 있는건 이거에요. 고도는 오지 않지만, 경도는 이미 와 있습니다. 추사에게 아내는 죽음너머로 건너가서 다시는 닿을 수도 만날 수도 없지만, 경도는 지금도 곁에 있다는겁니다. 제목은 '경도가 어딘가로 떠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우가 경도에게 아직 도착하지 못한 이야기인 겁니다.
그렇다면 도망시는 무엇을 예언하고 있을까요? 작가는 왜 풋풋한 사랑을 시작하던 20살 지우와 경도에게 이런 아픈 그리움의 시를 먼저 들려줬던걸까요? 단순히 넣은건 아니겠죠. 도망시가 예언하는 건 "너희는 결국 헤어질 거야"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사랑을 이렇게 다루면, 언젠가는 정말로 추사처럼, 고도처럼, 만날 수 없는 사랑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입니다. 예언이 아니죠. 미리 정해진 결말이 아니라, 돌아갈 수 있다는 메세지인겁니다. 이 감정의 순도를 너무 멀리 보내지 말라는 경고, 너무 머뭇거리지 말라는 경고. 그리움으로 굳어버리기 전에 붙잡아야 한다는 충고. 사랑이 비극이 되기전에 아직 선택할 수 있다는 메세지를 담고 있는 겁니다.
사랑은 떨어져 있을 때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태에 계속 머물면 사랑은 관계가 아니라 평행선처럼 영원한 그리움으로 굳어버립니다. 도망시는 사랑의 가장 극단적인 상태, 더 내려갈 수 가장 낮은 자리를 보여주거든요. 그래서 시가 지우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우리는 왜 지금 사랑을 선택하지 않는가?"라고 말이죠. 지우가 도망시를 듣고 울었던 이유가 여기 있는 겁니다. 시간 단순히 슬퍼서만이 아닙니다. 경도를 잃을 것 같아서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이 사랑을 선택하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이미 죽은 추사의 아내처럼 스스로를 상처속에 가두고 있거든요. 지우는 그 감정의 순도, 비극의 무게를 간접 경험한 겁니다. 자기 상처의 무게만큼 그 시를 알아본 겁니다. 사랑을 선택하지 못할 자신을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겁니다.
추사의 기다림은 객관적 불가능 앞에 선 비극입니다. 고도의 기다림은 존재론적 불가능을 정당화하는 회피입니다. 하지만 지우의 기다림은 심리적 불가능을 스스로 만들어낸 선택입니다.
드라마의 비극은 전부 지우의 내부 상태에서만 나옵니다. 비극은 아무리 선택해도 결과가 바뀌지 않지만, 지우는 선택만 하면 결과가 바뀝니다. 이게 핵심이죠. 도망시는 결과를 비극처럼 예언하는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그 시가 말하는건 운명이 아니라 조건입니다. 선택하지 않으면 이 사랑은 추사와 고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그 잘기에 서게 된다는겁니다. 사랑이 관계가 되지 못하고 그리움으로만 굳어버린 가장 낮은 감정의 자리로 내려간다는 겁니다.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지금 선택하면 그 비극은 오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도망시는 끝을 말하는 시가 아니라 끝이 되지 않게 하라는 따뜻한 메세지인겁니다. 사랑이 아직 살아 있을 때 아직 손이 닿지 않을 때 그 감정을 단지 그리움이 아니라 삶으로 선택하라는 말인겁니다. ‘도망시’는 역설적이게도 지우에게 희망을 전해주고 있는 겁니다. 지우에게 희망은 사랑하면 다 괜찮아질 거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의 나로도 이 사랑을 선택해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순간이 희망인겁니다. 그 자리에서 더는 도망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결단, 그래서 희망은 오지 않는는 시간이 아니라 용기이고 마침내 지우가 내리는 선택인겁니다.
‘경도를 기다리며’ 지우를 따라가며 끝까지 붙잡고 있는 질문은 그거죠. 우리는 왜 지금 사랑을 선택하지 않는가?인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