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워치에서 보이는 '매트릭스'

'모자무싸'

by 십팔점오도





박해영작가는 왜 매트릭스를 가져왔을까

모자무싸에 황동만이 찬 시계 특별하지 않나요? 감정시계에요. 변은아도 차고 있구요. 이걸 보면 마치 매트릭스를 보고 있는 것같지 않나요? 드라마속에 중요한 장치이 이 감정시계는 드라마 전체에 있어서 아주 특별한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 매트릭스는 이런 이야기예요. 사람들이 매일 밥을 먹고, 일을 하고, 누군가를 좋아하고, 괴로워해요. 일반 세계와 다를게 없죠. 그런데 네오가 누군가가 준 알약을 먹으면서 깨어나고 사람들이 모두 기계가 만들어 놓은 거대한 인큐베이터 안에 누워서 기계가 제공하는 프로그래밍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는걸 발견하는거죠. 네오가 진짜라고 믿었던 것들이 전부 가짜였던거예요. 기계가 만들어놓은 세계 안에서 모두가 벌어지는 일이에요. 그게 사랑이 됐든 분노가 됐든 똑같아 보이는 세상이지만 가짜에요. 진짜 무서운 건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그 감옥을 진짜 세상이라고 믿고 있다는 거예요. 가짜인 줄도 모르고 사는 겁니다.

이 드라마가 매트릭스를 가져온 이유가 비슷합니다. 바로 그 장치, 가상현실을 깨우던 알약같은 장치가 황동만과 변은아가 차고 있던 감정워치이구요. 그러니까 ‘모자무싸’는 이거에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사람이 '진짜 나’로 살 수 없게 만드는 시스템 안에 있다입니다. 그게 매트릭스와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겁니다.

원래 사람은 제각각이에요. 같을 수 없죠. 같아서도 안되구요. 누군가는 봄 같은 사람이고, 누군가는 겨울 같은 사람이에요. 누군가는 바람처럼 자유롭고, 누군가는 햇빛처럼 따뜻해요. 이 드라마에서 "날씨"라는 말이 자꾸 나오는 건, 바로 그 사람만이 가진 고유한 성질, 그러니까 “나다움”을 뜻하기 때문이에요. 황동만의 시나리오, 날씨를 만들어 준다는 것도 결국 그 ‘나다움’을 찾는 사람의 이야기거든요. 내가 정말 화가 나는 것에 화를 낼 줄 알고, 슬픈 것을 보고 슬퍼할 줄 알고, 싫은 것을 싫다고 말할 줄 아는 것, 그게 내 안의 날씨예요. 그게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그렇게 되나요. 어림없죠. 세상은 그걸 허락하지 않아요.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적응해야 해요. 세상이 원하는 방식대로 웃고, 세상이 원하는 방식대로 참고, 세상이 원하는 방식대로 웃고, 쫓아가야 하고 반응해야 해요. 그래야 도태되지 않고 버려지지 않고 뒤처지지 않고 비슷하거나 좀더 우월감을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죠.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내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모르게 되겠죠. 자기만의 날씨, 자기만의 계절이 사라지는 거예요.

매트릭스에서 사람들이 기계가 만든 세상을 진짜라고 믿었던 것처럼, 이 드라마의 사람들도 비슷합니다. 세상에 적응하며 사는 것을 자기 삶이라고 믿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진짜가 아니에요. 세상이 짜놓은 대로 따라간 것이지, 내가 선택한 게 아니에요. 그래서 황동만의 시나리오 제목이 "날씨를 만들어 드립니다"인 거예요. 날씨가 사라진 세계,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기다움을 잃어버린 세계에서, 누군가가 날씨를 다시 만들어주겠다는 이야기예요. 사라진 '나’를 되찾는 이야기예요.

박경세의 영화 제목 "팔 없는 둘째 누나"도 그래서 기막힌 위트에요. 아마도 가장 어처구니 없고 황당한 제목을 뽑느라고 고민했을 것같은데요. 뭐 3류 가 아니라 4류 영화도 이런 제목은 짓지 않을거에요. 누가 봐도 이상한 제목이에요. 팔은 없고 액션은 난무하고 그런데 아무도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아요. 오히려 여러 지인들은 천만영화각이라고 말을 하고 극찬들을 하면서 칭찬을 합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랑 똑같아요. 다들 알고 있어요. 뭐 알고 느끼는 단계를 지나버린건지도 모르겠지만요. 제가 볼 때 8인회는 모두 느끼고는 있을 겁니다. 이상하다는 걸요. 그런데 아무도 말 못 해요.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때 가장 비참한 사람은 어쩌면 박경세 자신일겁니다. 자기가 만든 영화가 진짜 자기 것이 아니라 시스템에 맞춰 만든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알고 있을겁니다. 예전에 자기가 꿈꾸고 황동만이랑 웃으면서 영화를 이야기하고 자기들 꿈을 얘기하던 그 기억이 아마 그대로 있을 겁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먹고 살고 있는거죠. 조정세가 그토록 과장될 정도로 스트레스를 갖고 있고, 차에서 뛰어내려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반 미치광이같은 짓을 했던것도 그만큼 박경세도 느끼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날씨는 사라지고 획일적이고 강요된 똑같은 날씨속에 자신이 살아간다는걸 알고 있는거에요. 그게 아니지 않냐고 황동만이 끊임없이 떠들어대고 몸부림하기 때문에 조정세가 괴로운겁니다. 정말로 조정세앞에서 깽판을 놓기 때문에 그런게 아니에요 .

그런데 황동만의 감정워치가 나옵니다. 무슨 sf같죠. 처음 선공개 됐을 때 ‘대체 저게 뭐지?’했던 바로 그 시계입니다. 상상이 가미된 감정을 읽는 시계에요. 월 40만원 받는 무직자들을 대상을 했던 이벤트였죠.

이 시계는 사실 단순히 기분이나 감정상태를 읽어주는 기계가 아니에요. 매트릭스에는 사람을 시스템에 연결하는 플러그가 있어요. 목 뒤에 꽂는 거요. 그 플러그가 꽂히면 사람은 가짜 세상에 접속되죠. 반대로 빨간 알약을 먹게 되면 진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진짜 세상, 진짜 자신을 만나게 되는거죠.

감정워치는 바로 그겁니다. 이 시계는 마치 매트릭스에 플러그인을 뽑고 빨간 약을 먹는 것과 비슷한 장치입니다. 세상이 지워버린 내 안의 진짜 상태가 보이기 시작해요. 내가 지금 불안한지, 떨리는지, 들뜬 건지, 외로운 건지, 그런 장치인겁니다. 세상이 "그런 건 신경 쓰지 마"라고 가르쳤던 것들, 그렇게 순진해서 어떻게 살아가냐며 얘기했던 진짜 자기다움, 감정, 날씨를 표시해주는 거에요.

황동만이 이 시계에 매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황동만은 이 시계에 열광을 하죠. 카톡을 100개 넘게 보내기도 하고 수시로 자신의 감정이 표시되는걸 신났다고 단톡방에 끊임없이 올려댄다고 합니다.

세상은 계속 황동만에게 말해왔어요. “너는 틀렸다.” “네 방식은 안 된다.” “네 꿈은 낡았다.” “네 존재는 우스꽝스럽다.” 비하하고 조롱하고 무시되고 존재감이 없거든요. 마치 모두가 한쪽 눈을 가리고 살면서 이게 맞는거라고 우기는 세상에서, 두 눈을 뜨고 있는 사람에게 "네가 이상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두 눈을 뜨고 사는 사람에게는 이게 아닌데라고 미칠지경이겠죠.

황동만이 미칠 것 같은 이유는 이거예요. 나는 틀린 게 아닌 것 같은데, 왜 모두가 내가 틀렸다고 하지에요.

그래서 감정워치에 매달려요. 그 시계는 적어도 이렇게 말해주니까요. “너는 지금 이렇게 느끼고 있다. 너는 아직 반응하고 있다. 너는 아직 살아 있다.” 라고 가리키고 있거든요. 황동만에게는 그게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해주는 유일한 장치였던겁니다.

황동만이 8인회 카톡방에 미친 듯이 메시지를 쏟아붓는 것도 그래서예요. 그건 사람들을 괴롭히려는 게 아니에요.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살아있다. 자신이 살아있다라는 쓸쓸한 감격이고 유일한 생존신호 였던 겁니다.

이야기를 만들고 문화를 만든다는 8인회 멤버들은 정작 전부 현실에 순응하며 살고 있어요. 세상이 시킨 대로, 업계가 원하는 대로 맞춰서 살아가요. 자기다움이 아니라 세상이 허락하는 방식으로요. 황동만은 그 질서에 끝내 순응하지 못한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황동만의 광기는 고집이 아니라 개인의 힘없는 저항이에요. 이 시스템이 가짜라고, 나는 아직 나를 버리지 않았다고 몸부림치는 거예요. 마치 맥박이 뛰고 심장이 뛰는 장치를 보는 것처럼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음을 감정워치가 보여주는 겁니다. 그 점에서 황동만은 이 드라마의 네오에 가까워요. 모두가 현실이라고 믿는 세계가 어딘가 잘못됐다는 걸, 혼자 느끼고 있는 사람인겁니다.

이 시계를 차고 있는 인물이 또 있죠. 변은아입니다. 변은아는 황동만과 닮았지만 다른 방식으로 같은 경계에 서 있어요. 변은아도 감정워치를 스스로 선택해서 찼을 겁니다. 자기 안의 진짜 상태를 확인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뜻이니까요. 변은아 역시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은겁니다. 다만 황동만이 "나 살아있다"고 외치는 사람이라면, 변은아는 "들키면 안 된다"고 숨기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둘의 뿌리는 같아요. 둘 다 사라질까 봐 두렵고, 버려질까 봐 두려운 겁니다.

변은아는 어릴 때 버려지고 방치된 상처가 있어요. 그래서 누군가가 떠나거나 관계가 흔들릴 때, 그건 단순한 불안이 아니라 과거에 버려졌던 그 순간 전체가 다시 돌아오는 거예요. 그때 변은아는 코피를 쏟아요. 마음이 감당을 못 하면 몸이 먼저 무너지는 거예요. 버려지지 않으려면 방법은 간단해요.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살면 돼요. 눈치 보고, 맞추고, 잘하고, 내 안의 것은 접어두면 돼요. 그래서 변은아는 황동만과 8인회의 그 중간에 서 있는 사람인겁니다. 진짜 자기가 뭔지 알고는 있는데, 그걸 끝까지 밀고 갈 용기는 아직 없는 사람.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그 시스템을 떠나지는 못하는 사람. 그 경계를 버티지 못할 때 몸이 피를 흘리는 거예요.

코피를 쏟는 변은아는 자신이 없었는데 황동만을 보고 희망을 갖습니다. 이 지점이 매트릭스와 정확히 만나요. 매트릭스에서 ‘모피어스’와 ‘트리니티’가 네오라면 이 시스템을 이겨낼 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갖게 되죠. 진정한 구원자 ‘더 원’일 거라고 봅니다. 그 한 사람. 도끼처럼 강하게 보이는 변은아는 사실 버거워요. 시스템에서 저항을 하면 버려질지 모른다는 공포로 코피를 쏟거든요. 그런 변은아가 볼때 거침없고 괴짜같고 부딪히고 몸부림을 하는 황동만이 정말 강한 사람으로 보이는 겁니다. 20년을 여전히 버텨내고 ‘날씨를 만들어 준다’는 시나리오를 쓰죠. 굽히지를 않구요. 파워가 있어야 그게 답인 세상인데, 그 파워없이 세상과 맞서는 주인공이죠. 시나리오처럼요. 변은아가 도끼가 된 것도 사실, 그 파워가 있어야 세상과 부딪혀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을 했기때문이에요. 코피를 쏟으면서도 기꺼이 도끼라는 파워가 됐던거죠. 그런데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을 변은아는 늘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감정워치는 그런 장치였을 거구요. 황동만은 어쩌면 자기가 맞았고, 그 맞은 길에 대한 확인을 해준 사람인겁니다. 매트릭스가 무서운 이유는 가짜 세계를 만들어놓고,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 "이게 네 선택이야, 이게 네 현실이야"라고 믿게 만들기 때문이에요. 이 드라마도 똑같아요. 사람을 밀어내는 건 시스템인데, 사람들은 그걸 자기 능력의 문제로 착각해요. 세상이 누군가를 버려놓고, 그 사람에게 "네가 부족해서 그런 거야"라고 믿게 만들어요. 경쟁에 관한 게 아니에요. 시스템을 따르라는 획일적인 강요를 개인의 가치와 평가기준으로 절대화 하는거에요. 변은아가 갖는 공포와 두려움도 그거에요. 그게 자기탓이라고 학습되는거에요. 햇빛 쨍쨍한 게 가치인 세상에서 바람이 자신의 가치인 사람은 틀렸다고 버려지고 햇빛없는 자신의 무능으로 치부되고 평가되는거죠. 버려짐이 비참한 이유는 그래서에요. 8인회가 모두 영화 데뷔를 했다고 자화자찬을 하지만 그것 역시 자기다움을 포기하고 세상이 말하는 획일적인 가치에 부합했기 때문이죠. 이들 역시 버려진다는 두려움때문이에요.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지 뭐라고 할 수 있지만, ‘팔없는 둘째 누나’를 바라보는 마음은 어떨까요.

세상이 정상이라고 말하는 방식이 사실은 가짜이고, 진짜는 내가 원했던 것, 내가 느꼈던 것, 내가 되고 싶었던 것, 사실 그게 정상이에요. 천편일률적인 방식으로 기계처럼 학습되고 살아갈 수 없죠. 날씨처럼요. 감정워치는 그 상징적인 장치인겁니다. 그러니 황동만이나 변은아에게는 그게 얼마나 소중한 장치일까요. 황동만의 형 역시 흥미로운 인물이에요. 황진만은 아마도 그 길에서 깨지고 다친 사람으로 보입니다. 먼저 부딪히고 깨지고 버려진 아픈 경험을 한 거에요. 시인의 꿈을 꾸다가 버려진 사람이에요.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먼저 겪어버린 사람이에요. 그래서 동생 황동만이 자기 모습과 같은 겁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그런 연민이 있는 것으로 보이죠. 꿈을 접고 노동판으로 오라고 말해요. 그건 형이 나빠서가 아니에요. 매트릭스 식으로 말하면 자기 방식으로 좌절을 느낀 사람이 그냥 편하게 주어진대로 살자라는 포기에요. 가짜 세계를 부수려던 요원들이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에게 사살되고 죽음을 맞는것과 같다고 해야할까요? 저는 변은아가 코피를 흘리는 장면이 재밌더라구요. ‘매트릭스’를 보는 것같았거든요. 영화 매트릭스에서 요원들이 가상세계에서 심각한 손상을 입으면 현실세계에서도 영향을 받는다는거에요. 현실 세계의 네뷸래드네자르 호 안 의자에 앉아 가상세계로 들어간 요원들이 매트릭스안에서 공격당하거나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면 현실에서도 코피를 흘린다던지 입가에서 피를 흘리고 경련을 일으키기도 하고 심지어 사망하기도 합니다. 가짜 세상에서 변은아가 코피를 흘리던 장면이 오마주 되더라구요.

결국 이 드라마가 매트릭스를 가져온 이유는 분명해요. 시스템이 지배하는 미래를 보여주려는 게 아니에요. 사람이 진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채, 시스템이 허락하는 방식으로만 살아가는 현실을 보여주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드라마의 질문은 이거예요.


지금 내가 사는 이 방식은 정말 내가 고른 건가. 지금 내가 원하는 이것은 정말 내가 원하는 건가. 버려진 건 나인가, 아니면 나를 버려놓고도 아무렇지 않은 이 세상인가. 결국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시스템이 강요하는 획일적인 세상을 깨울 진정한 구원자 ‘더 원’이었던것처럼 ,변은아에게 황동만은 천개의 문을 열어두고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버텨내는 자신을 구원해줄 ‘더 원’이라고 본거죠.

스크린샷 2026-04-19 오후 3.17.03.png

#모자무싸 #구교환 #박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