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무싸' 리뷰
황동만이 그토록 거절당하는 시나리오의 제목이 ‘날씨를 만들어 드립니다’입니다. 시나리오는 황동만을 말하고 있을 겁니다. 이 시나리오는 어쩜 이 드라마 전체를 축약해 놓은 제목으로도 보여요. 그것과 함께 변은아가 황동만에게 했던 말이 있습니다. ‘감독님은 천개의 문이 열려있는거 같애요’ 애매해 보이는 말이에요. 이 두가지가 사실 선공개에서 제일 먼저 나왔던 중요한 장면인데요. 어쩌면 이 드라마 전체에 있어서 황동만과 변은아를 은유해 놓은 중요한 축약판인 것같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의 핵심은유인거죠.
날씨는 원래 누가 만들 수 있는게 아니죠. 제목처럼 내가 만들어서 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황동만은 왜 이 제목의 시나리오를 들고 다니는 걸까요? 날씨는 당연히 밖에서 오는 겁니다. 비가 오고, 바람도 불고, 햇빛이 비치고, 추위가 몰려오고, 눈보라도 들이치구요. 사람이 통제하는 그런게 아니에요. 그냥 사람은 그 안에서 반응하며 살 뿐이죠. 날씨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에게 다가오는 겁니다. 밖에서 오는 반응이에요. 또 그런 날씨를 느낀다는건 살아 있다는 감각이잖아요. 그런데 황동만은 이 시나리오 배경에서 그 날씨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날씨가 사라졌다는건 뭘까요? 바람도 없고 비도 없고 눈보라도 없고 햇살도 없어요. 아무 것도 없죠. 그냥 맑기만 하거나 바람이 부는게 아니에요. 내가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하는 아무 것도 나에게 오지 않는 세상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어요. 비를 맞을 일도 없지만 햇빛을 느낄 일도 없습니다. 외부에서 나에게 찾아오는 날씨가 사라졌다는건 아무 것도 나에게 찾아오지 않는다는 얘기죠. 날씨가 없다는건 곧 아무도 그 누구도 나에게 반응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회 구성원으로 살잖아요. 그 속에서 누군가의 관심도 있고, 무시도 있고, 칭찬도 있겠죠. 비난도 있구요. 마치 눈보라고 있고, 바람이 있고 햇빛이 있는 날씨처럼요. 날씨가 사라진 세계가 아무것도 나를 건드리지 않는 세계라면, 이걸 아무도 내게 읽어주지 않고, 판단하지도 않고, 심지어 거절조차 하지 않는 황동만의 상태를 말하는겁니다. 왜냐하면 황동만이 겪은 건 “거절”보다 “무시”에 가깝잖아요.
최동현이 그러거든요. “밀려 들어오는 대부분 일일이 다 읽을 순 없고…” “내가 읽어야 되는 것만 내 책상 위에 올려 놔.”
20년 동안 시나리오를 들고 다녔어요. 제대로 읽혀본 적이 없습니다. 거절당한 것도 아니에요.
애초에 책상 위에 올라가지도 못한 사람이었죠. 거절은 적어도 누군가가 나를 보고 판단한 결과예요.
무시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하는 거예요. 그게 더 잔인해요. 그러니까 황동만이 되찾고 싶은 건
성공 이전에, 나한테도 뭔가가 오기를, 누군가가 나를 향해 반응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에요.
비바람이어도 좋으니까 뭐라도 오기를 바라는 마음인거죠.
황동만의 세상은 날씨가 사라져버린 세상인거에요. 아무 소식도 없고, 아무 반응도 없고, 아무 접촉도 없는 그래서 존재가 확인되지 않은 황동만의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변은아가 황동만의 시나리오를 읽고 아프게 지적하죠. .
“주인공한테 파워가 없다”는 얘기를 합니다. 이건 시나리오 속 주인공을 향한 말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황동만에 대한 이야기죠. 물론, 작가에 의해서요.
“제대로 싸우지 않던데요.” “적도 티미하고 주인공도 티미하고.” “사람들은 전부 파워에 굶주려 있어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부 다.” 그렇게 지적해요.
변은아는 예리한 도끼와 같은 사람이에요. 관객이 원하는 걸 볼줄 안다는거에요. 변은아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고, 지치지 않고, 거침없이 뚫고 나가서 결국 해내는 주인공. 그걸 보면서 같이 웅장하게 터지고 싶은데, 여기 주인공은 전혀, 라고 황동만의 작품을 평가합니다.
그런데 이건 그냥 구조적 결함 지적이 아니에요.
황동만이라는 사람이 왜 이런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는지를 꿰뚫어 본 말이에요.
그러니까 황동만은 자신의 작품에서 "싸운다"는 로그라인을 써 놓고도 정작 이야기 안에서는 제대로 못 싸우는 주인공을 만들었던거에요. 왜일까요? 작가인 황동만 자신이 지금까지 세상과 정면으로 부딪쳐 이겨본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겁니다. 감정을 되살리고 싶은 사람인데 정작 자기 감정조차 힘 있게 꺼내지 못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니 그 주인공도 세상을 바꿀 힘보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버티는 힘에 더 가까운 인물이 됐던 걸로 보입니다. 작품이라는게 그렇잖아요. 자기 안에 없는 걸 쓸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여기서 진짜 흥미로운 역설이 나와요.
변은아 말이 맞아요. 사람들은 다들 현실에서 무력하니까 이야기 안에서라도 거침없이 해내는 주인공을 보고 싶어하죠. 그런데 박해영 작가가 써온 인물들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전에 제 영상에서도 박해영 작가의 세계관과 인물들을 분석해 드렸는데요. 박해영 작가의 작품들속에 인물들은 한번도 그런 인물이 아니었어요. 잘나지 못하고, 무너졌고, 창피하구요. 말끔하게 해결하지도 못합니다. 그래도 버티는 사람들이라는거에요.
그래서 이 장면이 재밌지 않나요? 변은아 피디의 상업적 문법으로 보면 황동만의 시나리오는 약점이 뚜렷한데, 박해영의 드라마 문법으로 보면 그 약점 자체가 핵심 주제거든요.
변은아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파워가 없다"고 정확히 짚어요. 드라마는 "맞다. 그런데 현실의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다"라고 받아칠 가능성이 커요. 재밌지 않나요? 자신이 설정한 이야기를 반박하는 구조거든요. 박해영의 드라마가 자기 정체를 선언하고 있거든요.
여기서 최동형의 태도가 중요하죠. “밀려 들어오는 대부분 일일이 다 읽을 순 없고, 이 친구가 먼저 읽고
내가 읽어야 되는 것만 내 책상 위에 올려 놔.”라고 말을 합니다. 단순히 업계 현실 묘사였을까요? 아닙니다. 황동만이 왜 이런 인간이 되었는지 보여주는 구조예요.
우리 사는 세상에서 한 사람의 가치라고 하는게 스스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누가 올려주느냐,
누가 픽하느냐, 누가 읽을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느냐에 따라 생기는 겁니다. 최동현은 그 가치를 발견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가치를 소유하고 명명하는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에요.
“내 픽이야. 최동현 픽.” 그거에요. 그리고 변은아는 그 시스템 안에서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도끼였던거구요. “옛날엔 시나리오 잘 깐다고 도끼로 날렸는데 요즘엔 화력이 좀 그래. 날 좀 갈았어. 까봐.” 잔인하죠. 시나리오를 듣고 싶은 게 아니에요. 까는 걸 구경하고 싶은 거예요.
이게 황동만의 시나리오 속 AI와도 최동형은 묘하게 겹치죠. AI는 감정 없는 효율의 시스템이고, 최동형식 업계는 감정보다 선별과 권력의 시스템이에요.
이 세계에서 황동만의 작품, "날씨를 되찾겠다"는 건 결국 인간적인 반응, 감정, 살아 있음을 되찾겠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변은아의 혹평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잔인하기만 한 걸까요. 아닙니다.
저는 이게 제일 특별하다고 봐요. 그래서 드라마 시작전에 선공개로 넣었던 것같습니다. 전체 이야기의 뼈대거든요. 변은아는 황동만을 칭찬하지 않아요. 날카롭게 찌르죠. 그런데 중요한 건 드디어 누군가가 황동만을 제대로 읽었다는 겁니다. 그동안 황동만이 겪은 건 거절이 아니라 무시였어요. 변은아는 무시하지 않아요. 아주 정확하게 읽고, 정확하게 찔렀던거에요.
잔인하지만, 이건 반응이에요. 접촉이에요. 황동만은 햇빛이 아니라도 좋았을 겁니다. 비바람이라도 좋으니, 뭐라도 자기에게 와주기를 바랬을 거구요. 변은아의 비평은 혹평이면서 동시에 황동만에게 드디어 처음 닿는 날씨였을 겁니다.
자 그런데 또 다른 장면이 있어요. 변은아가 황동만에게 이렇게 말해요.
“감독님은 천 개의 문이 열려 있는 사람 같다.” 천개의 문, 애매해 보입니다. 천개의 문이 뭘까요?
황동만은 이 말에 은근히 감격을 합니다. 문은 안과 밖을 잇는 경계잖아요. 내 안으로 무언가가 들어오는 통로에요. 또 내 안의 것이 밖으로 나가는 통로이기도 하죠. 나와 다른 사람이 만나는 경계가 바로 문입니다.
"문이 열려 있다"는 말은 그러니까 그 사람이 감정이든 타인이든 상처, 기쁨, 우연, 세계에 어떤 것에서든
닫혀 있지 않다는 뜻인 겁니다. 문이 닫혔다면 뭘까요? 안전할 수는 있어도 잘 안 흔들리고, 잘 안 다치겠죠. 대신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황동만이 20년간을 무시당했다고 하죠. 보통 20년 동안 무시당하면 사람은 둘 중 하나가 돼요. 완전히 냉소적이 되거나, 자기 문을 꽉 잠가버리거나 그러기 쉽죠. 그런데 황동만은 안 그래요. 여전히 말이 많고, 여전히 반응이 크고, 여전히 상처도 잘 받고, 여전히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고, 여전히 뭔가를 믿고, 여전히 시나리오를 씁니다. 한편으론 산만하고 허세처럼 보이는데, 다르게 보면 아직 죽지 않은 감수성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 모두가 황동만을 볼 때 "저 사람 왜 저렇게 시끄럽고 정신없어?"라고 보는데, 변은아는 다르게 봤다는 얘기가 되는 겁니다. "저 사람은 아직도 닫히지 않았구나"라고 본 거예요.
근데 문이 백개도 아니고 천개에요. "천 개"라는 숫자가 어떤 의미일까요? 중요한 의미입니다.
문이 하나 열려 있다가 아니라 천 개에요.
감정의 문이 많고, 생각의 문도 많고, 상상의 문도 많고, 타인에게 반응하는 문도 많고, 상처받는 문도 많죠. 그렇게 보면 사람의 여러 연결 통로는 수백개정도가 아니겠죠.
황동만은 한 가지로 정리되지 않는 사람이에요. 허세꾼 같다가도 순수하고, 한심해 보이다가도 예민하고,
웃기다가도 슬프고, 찌질한데 이상하게 고귀한 구석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의 정답으로 닫힌 사람보다
이쪽 문도 열리고 저쪽 문도 열리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죠.
그러면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문이 천 개 열려 있으면 따뜻한 사람이라는 뜻일 수도 있죠. 그런데 동시에 자기를 지키는 문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해요. 문이 다 열려있잖아요.
20년 동안 거절당한 사람이라면 진작에 문을 닫았어야 정상이에요. 상처입고 아픈 자신을 지켜야 하잖아요. 그런데 황동만은 안 닫았어요. 천 개가 그대로 열려 있어요. 이건 대단한 게 아니라 위험한 거예요. 아무나 들어올 수 있다는 거고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도 되거든요.
최동형이 “까봐” 한마디 하면 자기 20년이, 자신의 고뇌로 작업한 시나리오가 오락거리로 까여야 하는 사람이 됩니다. 문이 열려 있으니까 막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이게 무가치함과 연결됩니다.
문을 닫은 사람은 무가치함을 덜 느낄 수 있죠. 왜냐하면 문을 닫았거든요. "내가 안 연 거니까, 안 온 건 당연해"라고 자기한테 변명이 되거든요. 그런데 문을 열어놓은 사람은 변명할 게 없어요. 나는 할 수 있는 걸 다 했어요. 열었어요. 그래도 안 왔어요. 남는 결론은 하나뿐이에요. 내가 가치가 없는 거구나라는 생각이죠. 천 개의 문이 열려 있는데 무가치한 거예요. 열어놨기 때문에 무가치한 거예요. 닫았으면 몰랐을 겁니다. 열어놨으니까 안 온다는 걸 알게 되고, 안 온다는 걸 알게 되니까 무가치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황동만이 한 말이 처절한 거예요. “아 진짜 성공은 바라지도 않아요. 그냥 한 편만 했으면 좋겠어요.” 천 개의 문을 열어놓은 사람이 바라는 게 천 개의 응답이 아니에요. 딱 하나만. 한 편만. 천 개 중에 하나만 누가 들어와 주면이라는 거죠.
세번째 선공개에도 나왔던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변은아가 다른 사람에게 묻죠. “사람들은, 8인회 멤버들은, 왜 그토록 황동만 감독을 힘들어해요?”라고 합니다. 좀 이상하죠. 황동만이 힘들어야죠. 영화 한 편 못 만든 사람이에요. 5편 만든 박경세가 황동만을 힘들어할 이유가 뭐가 있어요. 톱배우 장미란이 황동만 때문에 괴로울 이유가 뭐가 있어요.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만이잖아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힘들어 해요. 이건 황동만이 뭘 해서가 아니에요. 뭘 안 해서예요. 포기를 안 해서에요.
박경세도 처음엔 그랬을 거예요. 간절하고, 순수하고, 문이 천 개 열려 있었겠죠. 그런데 5편을 만드는 동안 닫혔을 겁니다. 타협하고, 계산하고, 업계의 논리에 맞추면서 하나씩 닫았어요. 그래서 돌아오는 말이 "데뷔작이 제일 나았다"인 거예요.
그런 박경세 앞에 황동만이 서 있어요. 아직도 문을 안 닫은 사람이 있는 겁니다. 아무것도 못 만들었는데
아직도 그 상태인 사람이에요. 박경세가 황도만을 볼 때마다 보이는 거예요. 자기가 닫은 문이 보이고 자기가 버린 순수함이 보이구요. 그게 힘든 겁니다. 장미란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하고 싶은 작품 대신 되는 작품을 골랐을 거예요. 자기 신념 대신 시장의 요구를 따랐을 거예요. 그런데 황동만은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자기 시나리오를 안 버렸어요. 장미란이 버린 것을 황동만은 아직 들고 있어요.
그게 견딜 수 없는 거죠. 그게 힘든 겁니다. 8인회 멤버들 전부 비슷할 거예요.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았고, 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문을 닫았거든요. 그런데 황동만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으면서 아직도 문을 안 닫았어요. 못나서 구질구질하게 자기들에게 시비를 걸어서 힘든 게 아닙니다. 못났는데도 안 변해서 힘든 거예요. 황동만은 아무 말도 안 해요. 여전히 거기 있어요. 그런데 거기 있는 것만으로 8인회에 질문이 되거든요. “너는 왜 변했어?”라는 질문이요.
변은아가 중요하죠. 변은아는 유기 공포가 있는 사람이에요. 버려질 것 같으면 몸이 먼저 망가지죠.
살아남기 위해 예리해졌고, 날카로워졌고, 도끼가 됩니다. 아마 문을 많이 닫고 사는 사람일 거예요.
그런 변은아가 황동만을 보고 놀라는 건, 이 사람은 자기보다 훨씬 더 도태됐고, 훨씬 더 무시당하고 살았거든요. 그런 황동만이 여전히 안 닫혔고 여전히 열려있다는게 놀라운겁니다.
"천 개의 문이 열려 있는 사람 같다"는 로맨틱한 수사가 아니에요. "저 사람은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지?"에 가까운 감탄이에요.
그래서 앞에서 은아가 "주인공한테 파워가 없다"고 말한 것과 "천 개의 문이 열린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모순이 아니에요. 같은 사람의 양면인겁니다. 황동만은 세상을 박살 내는 식의 화끈한 파워는 없어요.
그런데 무시와 실패 속에서도 닫히지 않는 힘이 있습니다. 공격하는 힘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힘.
밀어붙이는 힘이 아니라 버티는 힘. 단단해서 강한 게 아니라 열려 있어서 강한 힘이 있습니다. 그걸 변은아가 보게 되는 거죠.
변은아는 시나리오를 읽고 결함을 봤지만, 사람을 보고는 결함 안에 숨어 있는 생명력을 봤던 겁니다.
"파워가 없다"는 진단과 "천 개의 문이 열려 있다"는 인정이 한 인물 안에서 동시에 성립하는 거예요.
그리고 황동만이 감격한 건 바로 그거죠. 누군가 처음으로 자기의 산만함, 과잉, 허세, 소란을
결함이 아니라 열림으로 읽어줬다는 겁니다. “아,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살아 있는 거였구나.”라는 걸 처음 변은아로 인해 날씨처럼 알게 된거에요.
그러니까 황동만의 시나리오 〈날씨를 만들어 드립니다〉는 황동만이 세상에 내민 구조 요청서에요. 자기 소멸감으로부터 무가치함으로부터요, 변은아의 혹평은 그 구조 요청에 처음으로 돌아온 응답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천 개의 문이 열려 있다"는 말은 그 응답이 도착할 수 있었던 이유였던거죠.
문이 열려 있었으니까 비바람이라도 들어올 수 있었던 겁니다.
<나의 아저씨>를 비롯한 박해영 작가의 사랑은 늘 여기서 시작하죠. 좋아한다가 아니라, 먼저 알아본다에서 시작합니다. 황동만에게 처음 날씨가 도착하는 그 순간을 이렇게 기막히게 표현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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