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도를 기다리며
지우와 경도는 결국 마지막에 재회를 하네요. 세 번째 이별에서 지우는 이전과 다르게 단단해졌고 마지막에는 경도를 붙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이 같은 무게가 됐죠. 두 사람의 재회를 위해 설정된 우식의 죽음은 좀 뜬금없기는 했지만 설정 자체는 의미가 있었던것같습니다. 물론, 그 개연성이 조금더 탄탄했더라면 인물의 서사가 조금더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왜 우식이 죽어야 했었나 의미자체는 좋았던 것같습니다. ‘경도를 기다리며’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드라마 ‘경도를 기다리며’가 도착하는 목적지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사랑에는 ‘다음’이 없다는 겁니다. 조금 더 나아지면, 상황이 정리되면, 오해가 풀리면 그때 다시 선택하겠다는 말. 이 드라마 안에서는 그런 ‘다음’이 끝내 허락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유예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게 비단 연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니겠죠. 모든 사랑하는 사람을 말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을 향해 갑작스러운 죽음처럼 ‘우식’의 죽음이 배치된 이유같습니다. 사랑을 미루게 만드는 모든 핑계를 한순간에 지워버리기 위해서죠. 지금 아니면 내일은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지우와 경도의 사랑은 세 번의 만남과 세 번의 이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겉으로 보면 반복입니다. 비슷한 이유로 만나고, 비슷한 이유로 헤어집니다. 이별의 이유는 언제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어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사랑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떠나야 했던 이야기입니다. 지우가 처음 떠났던 이유는 경도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경도의 어머니가 한 달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으로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32만 원짜리 티셔츠를 사줬다는 사실. 그 일로 경도가 자기 부모를 다르게 보게 되었다는 말은
지우에게 사랑의 증거가 아니라 경고처럼 다가왔습니다. ‘내가 이 사람의 삶을 흔들고 있다’는 생각. 혼외자로 자라며 어릴 때부터 엄마의 힘든 시선 속에서 늘 한 발 물러서는 법을 먼저 배워 온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감각은 지우에게 견딜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지우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물러나는 선택을 합니다. 도망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인생에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려 자기 자신을 지워 버리는 방식의 책임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별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경도의 아버지가 사고로 쓰러지고, 지우는 자기 출생에 얽힌 비밀까지
마주하게 되죠. 혼외자라는 정체성. 그리고 언니의 말, “경도를 사랑한다면 떠나야 해.” 지우는 다시 판단합니다. 지금 가장 힘든 사람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 나, 곁에 있으면 오히려 더 큰 짐이 될 것 같은 나. 혼외자라는걸 알고부터 가족은 기댈 수 있는 울타리가 아니라, 조심해서 유지해야 할 관계가 되고, 부채처럼 마음에 남습니다. 지우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을 차마 붙잡지 못하고 말없이 떠나야하죠. 미뤄두는 것처럼, 도망치듯이요. 지우가 지금까지 배워온 사랑의 방식이었죠.
지우에게 사랑은 아무에게나 허락되는 감정이 아니라, ‘염치’라는 이름의 자기 검열을 통과해야만 가질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요. 미뤄둔다는 것, 그건 모두 막연하게 '다음'을 남겨두었다는 점입니다. 언젠가, 상황이 좋아지면, 덜 아프게 사랑할 수 있을 때 그때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는 암묵적인 유예. 이 유예가 바로 이 사랑을 붙잡아온 동시에, 가장 오래 괴롭힌 장치였습니다. 이 지점에서 이 드라마는 반복해서 다른 이야기들을 불러옵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영화 〈어바웃 타임〉, 그리고 추사의 시 〈도망시〉입니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인물들은 끝없이 누군가를 기다리지만, 고도는 오지 않습니다. 고도는 애초에 오지 않도록 설계된 존재입니다. 기다림이라는 말은 선택하지 않은 것에 이름을 붙여주고, 회피하는 것에 이유를 만들어줍니다. "아직은 아니야", "조금만 더 나아지면"이라는 말 뒤에 자신을 숨기는 것입니다. 미뤄두는 것을 합리화하죠. 이 드라마는 그 구조를 뒤집습니다. 지우와 경도에게 문제는 존재의 부재가 아니었습니다. 고도는 오지 않지만, 경도는 이미 와 있었습니다. 늘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서로 어긋났을 뿐입니다. 2007년부터 2014년까지, 두 사람은 '고도를 기다리며' 연극장에서 서로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계속 어긋났습니다. 지우는 경도에게 전화하라는 선배의 말 앞에서도 끝내 잡지를 못합니다.
기다림의 문제는 부재가 아니었습니다. 곁에 없어서가 아니라, 선택을 미뤄 두었기 때문이죠. 지우는 여전히 자기의 결정을 나중으로 밀어 둡니다. 떠나 있는 게 아니라, 아직 선택하지 않은 채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그게 지우가 반복해 온 기다림의 얼굴이었습니다.
추사의 〈도망시〉는 죽음으로 인해 갈라진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내세에는 부부가 서로 바꿔 태어나 나의 이 슬픈 마음을 그대도 알게 하리라." 추사에게 아내는 죽음 때문에 닿을 수 없는 존재가 됩니다. 객관적으로 만남이 불가능한 비극입니다. 하지만 지우와 경도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죽음 때문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기 때문에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 차이가 크죠. 추사의 기다림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지우의 기다림은 선택입니다. 문은 아직 열려 있고,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습니다. 「도망시」는 비극을 예언하는 말이 아니라 끝내 피할 수 없는 질문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면서도, 그럼에도 왜 지금 사랑을 선택하지 않는가.
선택을 미루는 순간, 사랑은 기다림이라는 이름으로 점점 멀어지죠. 끝내는 추사처럼 만날 수 없는 사랑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조용한 경고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바웃 타임〉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실수를 고치고, 더 멋진 고백을 하고, 완벽한 하루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말하는 핵심은 시간 여행의 판타지가 아닙니다. 아무리 시간을 거슬러 가도 사랑의 얼굴은 바뀌지 않습니다. 사랑은 더 나은 조건을 고르는 계산이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과 상황 속에서도 같은 사람을 다시, 또 다시 고르겠다고 마음먹는 겁니다. 영화의 결말에서 주인공은 시간여행을 포기합니다. 완벽한 과거를 만들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진짜 사랑은 특별한 순간에 한 번 고르는 게 아니라, 평범한 하루하루 속에서 그 사람을 계속 선택하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굳이 돌아갈 필요가 없겠죠. 사랑은 그대로니까요. 〈경도를 기다리며〉는 실제로 시간을 되돌릴 수 없지만, 구조적으로 〈어바웃 타임〉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20살의 지우, 28살의 지우, 38살의 지우. 각 나이에서 조건은 달라 보이지만, 본질적인 질문은 같습니다. " 그래도 이 사랑을 선택할 수 있을까?"에요.
가장 인상깊었던 놀이공원 장면이 있었죠. 놀이공원 장면에서 흐르는 "How Long Will I Love You"는 바로 이 질문을 노래합니다. 시간이 몇 번 바뀌어도, 상황이 몇 번 달라져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것인가. 꽃잎이 떨어지다가 다시 위로 올라가는 몽환적인 장면이 나오는데요. 이건 시간을 거슬러 가는 마법이 아니라, 시간이 흐른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는 두 사람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차이는 이것입니다.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은 조건을 고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우와 경도는 조건을 바꿀 수 없습니다. 20살의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고, 28살의 도망도 되돌릴 수 없습니다. 과거를 고쳐서 더 나은 조건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이 드라마는 "다시 해보자"가 아니라 "다르게 하자"입니다. 같은 현실에서 다른 태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아니야" 대신 "지금이어도 괜찮아"를 선택하고, "내가 망가졌으니까 안 돼" 대신 "상관없다. 망가져도 선택한다"를 고르는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지우가 대답을 하죠. ‘불륜녀’라고 하면 어때 난 상관없어라는 답을 던지거든요. 돌아갈 필요가 없는 이유는 사랑은 그대로이기 때문이에요.
경도는 20살의 지우도, 28살의 지우도, 38살의 지우도 매번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조건이 어떻든 너를 선택한다." 이것이 시간을 관통하는 사랑이었죠. 그게 상징화된게 바로 구멍난 500원동전과 회중시계였죠. 500원 동전의 가운데가 뚫려 있듯이, 시간이 이 사랑을 막아 세운 게 아니라, 그저 스쳐 지나갔다는 뜻입니다. 피하지 않고, 겪을 수 있는 만큼 모두 통과해 왔다는 말이죠. 이 사랑은 시간을 이긴 게 아니라, 시간을 살아낸 사랑입니다.
세 번째 이별에서 비로소 구조가 바뀝니다. 이번에는 경도가 떠나겠다고 합니다. 사랑을 포기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사라지는 선택입니다. 헤어지고 스페인으로 1년 여행을 가버립니다. 스페인 말라가에서 벨라진과의 대화를 통해, 경도는 배웠습니다. 사랑이란 때로 자신을 불리한 위치로 기꺼이 내보내는 선택이라는 것을. 벨라진이 피르코를 사랑하기에 불리한 상황에서도 떠나지 않았던 것처럼, 경도도 지우를 지키기 위해 떠나는 선택을 합니다. 추사의 시가 말하던 입장의 교환입니다. 두 번이나 떠나야 했던 지우의 자리에 이번에는 경도가 섭니다. 두 번이나 남겨졌던 경도의 자리에는 지우가 섭니다. 사랑은 처음으로 같은 깊이를 갖습니다. 서로를 더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니라, 서로를 덜 오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떠났던 사람은 '남겨지는 시간'이 어떤 무게인지 알게 되고, 남겨졌던 사람은 '떠나야만 했던 이유'가 얼마나 절박했는지 이해하게 됩니다. 공항에서 다시 재회하면서 연인은 그 상대의 마음을 알게 됐음을 고백하죠. 사랑의 중심은 “내 탓이야”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로 옮겨갑니다. 그 순간부터 사랑은 더 이상 혼자서 짊어질 짐이 아닙니다.
사랑은 내가 얼마나 깊이 사랑했는지를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마침내 이해하게 되는 순간, 비로소 완성됩니다. 완성된 사랑은 용기를 갖게 합니다. 마지막 화에서 등장하는 우식의 죽음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연극동아리 선배였던 우식이 낡은 공연장이 무너지며 갑작스럽게 죽습니다. 개연성이 다소 아쉬울 수 있지만, 이 죽음이 던지는 말은 의외로 단순하지만 무겁습니다. 삶은 미리 알려주지 않고, 기다려주지도 않으며, 사랑을 미룰 만큼 친절하지도 않습니다. 때로는 드라마보다도 더 아무 설명 없이, 아무 개연성 없이 갑자기 찾아옵니다.
이 장면은 슬픔을 말하는 게 아니라, 지금이라는 시간을 더 이상 유예하지 말라는 경고에 가깝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삶. 지금 이 사랑을 이대로 놓아도 되는가. 이미 곁에 와 있는 고도, 이미 손 뻗으면 닿는 경도.
그대로 놓아버리기엔 삶은 너무 갑작스럽고, 너무 예측할 수 없으며, 아무 설명도 하지 않습니다. 개연성조차 없이 사랑을 끊어 버릴 만큼 삶은 늘 먼저 와 버리니까요. 언젠가, 조금 더 나아지면, 상황이 정리되면 그때로 미뤄 두었던 그 ‘다음’은 정말로 올까요. 그 다음을 기다리는 사이, 삶은 아무 말도 없이 끝나 버릴 수도 있는 건 아닐까요. 우식의 죽음은 답을 주지 않습니다. 다만 이 질문만 남깁니다. 사랑을 계속 다음으로 미루기에는
삶이 너무 허무하게 끝나 버릴 수 있지 않느냐고요. 우식의 죽음은 단순한 장치가 아니에요. 추사의 시를 현재형으로 끌어오는 역할이었던 겁니다. 어쩌면 추사 역시 억울하게 옥살이로 갈라선 상황에서 개연성없이 아내마저 죽는 것이 얼마나 억울한 일이었을까 싶죠.
마침내 지우가 떠나려는 경도를 공항에서 붙잡습니다. 경도는 남습니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더 이상 유예하지 않고, 지금 이 자리에서 선택합니다. 그건 이전에 지우에게 마찬가지고 스페인으로 가려던 경도에게도 마찬가지죠. 이 결말이 해피엔딩처럼 보이는 이유는 결혼이나 아이 때문이 아닙니다. 이 사랑이 마침내 '다음'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두 사람은 다시 만납니다. 시간이 충분히 흘렀기 때문이 아니라, 서로가 같은 자리에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미루지 않고, 피하지 않고, 끝까지 겪어낸 뒤에야 비로소 용기가 생깁니다. 그 용기는 시간이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선택만이 만들어 냅니다. 사랑에는 다음이 없습니다. 지금 곁에 와 있는 사랑을 붙잡지 않으면, 그 사랑은 정말로 지나가버릴 수 있습니다. 사랑뿐이 아니겠죠. 사랑하는 모든 것, 추사처럼 고도처럼요. 지금이 아니면, 언제도 아니라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