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손으로 발권하던 시절이야기
어느덧 제주에 산 지도 19년째다.
1996년 4월에 제주국제공항 활주로에 쿵!하며 내려앉았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내 삶이 많이 달라질 줄, 그때는 미처 몰랐다.
달라진 삶 속에는 잦은 항공 여행도 포함된다. 수년 전에 양대 항공사 마일리지를 확인해보았더니, 누적 탑승회수는 300회가 넘었으니 몇 년이 지난 지금은 ‘비행시간’으로 300시간은 너끈히 채운 것 같다. 물론 조종이 아니라 승객으로서만 말이다. .
당시와 지금은 항공의 풍경이 많이 다르다. 취항 항공사도 많이 늘었고, 공항도 많이 붐빈다. 전에는 공항에서 바로 표를 구할 수 있는 경우도 많았지만 지금은 예약이 아니고서는 표 구하기도 어렵다. 그러고 보니 예약 시스템도 많이 변했다. 지금은 인터넷 예약이 보편적이지만 당시는 대개 항공사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했다(대한항공은 1588-2001, 아시아나항공은 1588-8000 이었다. 얼마나 전화를 많이 했던지 지금도 그 번호를 외고 있다)
하지만 갑자기 뭍에 나갈 일이 생기면 항공사 대표 번호에 전화를 걸어 표를 구하기는 어렵다. 그때는 얼마나 막막한지. 누구는 모처에 전화 한 통화로 도깨비 방망이처럼 표를 구한다던데, 이 섬에 신규 전입한 이방인이던 내가 어디 전화할 곳이라곤 오로지 2001 번과 8000번 뿐이었던 그 시절 답답한 마음에 발만 동동 굴렀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 막막한 상황에서 나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준 미스김, 그녀가 기억난다.
같은 병원에 근무하시던 어느 선생님께서 내가 비행기 표를 구하려고 안달이 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으시곤 내게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랬어? 내게 진작 이야기 하지. 이 번호로 연락해서 '미스김' 찾아. 그리고 내가 소개했다고 하고 표 알아 봐."
알려주신 전화번호는 시내에 있는 여행사였다. 전화를 걸었고 미스김과 통화를 했다. 몇 시간 뒤 그녀는 거짓말처럼 표를 구했다는 연락을 주었다. 나는 여행사로 한달음에 달려가 그녀가 볼펜으로 기록해준 종이 항공권을 황송한 마음으로 받아들고. 빳빳하고 빛이 나는 항공사의 봉투에 고이 담아 돌아왔다. 이후로는 왠만하면 미스김이 근무하는 여행사에서 발권을 했고, 급할 때면 그녀의 도깨비 방망이 신세도 종종 졌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인터넷이 보편화되자 이제 인터넷으로 발권하는 시대가 왔다. 인터넷 발권은 10% 정도 할인 혜택도 주니 여행사 이용이 점점 줄었다. 그러다 보니 미스김 만날 일도 없고… 그러고 보니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녀와의 인연을 끊어지고 말았다.
얼마 전 그 시절에 살았던 S시에 갔다가 미스김이 일했던 여행사를 찾아보았다. 여행사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옷 집이 되었다. 미스김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할까? 벌써 그만 두었겠지?
여행사들도 인터넷의 등장으로 많은 변화를 겪었을 테다. 나중에 알았지만 여행사는 항공사의 티켓 판매를 대행해주고 항공료의 6~7%를 수수료로 받았다. 하지만 승객이 인터넷으로 직접 예약을 하면 수수료에 해당되는 금액만큼을 할인해주는 것이다. 그 수수료 차액이 미스김같은 직원들의 월급이 되고 생활비가 되는 것이었는데.
인터넷이 편리하긴 하지만, 급할 때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어서 아쉬움이 많다. 가끔은 빳빳하고 윤기나는 항공사 로고가 찍힌 봉투에 담긴 비행기표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