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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묘 Jan 13. 2019

의과대학 본과1학년의 무게

전직 공대생의 시각에서 바라본 의대생의 공부량

필자는 이제 겨우 의대 본과1년차를 마쳤다.

생각해보니, 아직 마치진 못했다. 유급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의대 진학을 희망하는 사람들을 위해 본과 1학년의 학업 로드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본과 1학년 1학기에 들어야 하는 과목은 다음과 같다. 세포대사, 분자생물학, 세포구조와 기능, 인체발생학, 의료커뮤니케이션, 의학연구입문, 기본술기I, 통합역량I, 근육골격계통, 기초신경과학, 순환계통, 호흡계통. 총 12과목이었다. 12학점이 아니라 12과목이다. 끔찍하지 않은가? 다른 전공과였다면 1년 내내 나눠서 들었을 수업량을 한학기 만에 끝낸다.


아침 8시 30분 1교시를 시작으로 4교시가 끝나면 12시 30분, 점심시간 1시간을 쉬고 다시 돌아와서 6교시 - 7교시 까지 수업을 듣고 나면 오후 4시반쯤 녹초가 되어서야 학교를 나올 수 있다. 해부실습이라도 있는 날이면 저녁 먹기 직전에 끝나기도 한다. 수업을 듣는 것 만으로도 벅찬데 매주 토요일에는 중간고사가 기다리고 있다. 우리 학교는 중간고사를 특정 기간에 몰아서 보지 않고 1주일동안 같은 과목만 주구장창 듣게 한 다음에 1주차가 끝나면 중간고사를 치루고 그 다음 2주차 또는 3주차가 끝나면 기말고사를 본 뒤 한 과목을 끝내버리는 형태로 수업을 진행한다. 과목마다, 교수님마다 수업을 진행하는 방식이 조금씩은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그러했다. 두서없이 나열된 위 문장들을 읽다보니 난독증이 오는것 같지 않은가? 의대에서의 공부가 그러하다


의대 본과1학년때 봐야할 필수교재(족보)만 쌓아놔도 143cm


공대에 있을 때는 하루에 3-4시간 정도 수업을 들으면 나머지 시간은 자유였다. 그래서 동아리 활동도 하고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각자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시험기간에 빡세게 공부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의대에서는 오후 5시나 되어야 수업을 마치니 은행업무를 본다거나 우편물을 보내는 일도 할 수가 없고 하룻밤정도 친구들과 술마시고 놀았다가는 숙취로 다음날 수업도 못듣고 따라잡아야 할 공부량이 몇백 페이지씩 쌓이는 무시무시한 일을 겪게 된다. 필자는 공대에서의 습관을 버리지 못해 공부를 시험기간까지 미뤄두었다가 하루전날 굉장히 고생하곤 했다. 물론 나 말고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몇명 있는데 재시험기간 마다 얼굴을 보게 되니 참으로 반갑다. 의대마다 문화가 조금씩 다르지만 연대의대에는 재시험이라는 제도가 있다. 처음에는 공부를 못해도 진급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하는 착한 제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보니 학교가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끊임없이 재시험을 보게해서 학생을 탈진상태로 끌고가고 몇 차례 기회를 줘도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유급을 시켜버리는 무시무시한 제도였다. 본 의대에서 시험을 통과하려면 절대점수 70점을 넘어야 한다 (물론 과목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다). 그리고 70점을 넘기는 일이 결코 쉬운일은 아니었다. 필자가 70점 쯤이야 하고 설렁설렁 공부하다가 시험을 보면 어떤 과목은 70점 초반으로 가까스로 시험을 통과하고 어떤 과목은 60점대 후반으로 아깝게 재시험에 걸리고 만다. 그리고 재시험에 걸린 과목은 학기 말까지 미뤄졌다가 전 범위를 한꺼번에 보게 되는데 이 과정이 정말 끔찍하다. 오래전에 학습했던 내용이 기억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시험 범위까지도 엄청나게 늘어나고 공부할 수 있는 시간도 짧아져서 70점을 넘기는 일이 더 어려워진다. 교수님이 시험문제를 똑같이 내시면 쉽게 통과할 수도 있지만 문제를 바꾸기라도 하면 재시험에서 또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오호 통재라.. 아무튼 필자는 다행히도 1학기를 무사히 견뎌낼 수 있었다.


자, 이제 2학기로 넘어가 보겠다. 8월 2일 부터 17일까지 겨우 2주짜리 여름방학을 보내고 나면 벌써 9월 1일 부터 중간고사가 기다리고 있다. 2학기때 수강하는 과목은 소화계통, 비뇨/생식계통, 내분비계통, 약리학개론, 기초면역학, 임상면역학, 미생물학, 기생충학, 의료리더십, 선택과목(재난의학I,II), 선택과목(통일의료), 연구멘토링, 기본술기I, 통합역량 I, 총 14과목이었다. 의대에서의 하루하루는 시험기간이거나, 과제가 있는 기간이거나, 이렇게 두가지 종류로만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필자는 3분기에 들어서 드디어 포.기.하.고.싶.다. 라는 생각을 하고야 만다. 그래서 '어짜피 재시험이 있으니까 재시험 기간까지는 시험 스트레스 받지 말고 딴짓해야지'  라는 마인드셋을 장착하게 되었고 그 결과 몇 과목을 Fail (Non-Pass) 해버리는 끔찍한 결과를 받고야 말았다.


어떤 학생들은 "공부 안해도 돼~ 하루면 다 할 수 있어" 라는 말을 하면서 열심히 노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런 것에 속으면 안된다. 본인만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다른 친구들을 '견제' 하기 위한 수단이거나 원하는 만큼 시험성적이 잘 나오지 않을까봐 불안해서 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공부를 안해버린다. (학창시절에 공부 안하는 아이들이 공부얘기 하는걸 본적이 있는가? 그럴리 없다) 아무튼 나는 바보같이 이 말을 믿었고, 내 자신을 믿었다. 어짜피 암기밖에 없는 공부이니 진짜 하루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자신했고 시험 결과는 처참했다. 물론 노느라 공부를 못한건 아니었다. 의대 공부를 하면서 공대 연합동아리 활동에도 간간히 참여했고, 과외를 7개나 하고 있었고, 각종 공모전과 해커톤 등 여러 대회에 출전해서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상, 창조경제혁신센터장상, 연세경영연구회상, 건강보험 심사평가원장상 등 상을 수집하면서 창업 아이디어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검토하느라 공부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시험 하루 전날 무박2일 해커톤에 나가느라 밤을 샌 상태로 시험을 보기도 했으니 재시험을 받아도 할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바쁘게 살다보니 내 생활은 점점 엉망이 되어갔다. 씻지도 못하고 학교에 가는 것은 기본이고,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끊임없이 바쁘게 살아야만 했다. 몸은 점점 지쳐갔고 결국 학업의 끈을 놓아가고 있었다. 물론 핑계다. 이런 와중에도 잠을 줄이고 밥을 굶어가며 공부하는 친구들도 있다. 나는 씻지는 않았지만 잘 먹고 잘 잤다.


물론, 정말 천재같은 친구들이 있어서 운동이면 운동, 공모전에 나가서도 1등, 공부까지 잘해버리는 친구들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게 똑똑한 친구들도 상위10%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해야 하는 곳이 의과대학이다. 한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의대공부는 머리로 하는게 아니라 엉덩이로 하는 것" 이라고. 적절한 비유였다. 의대에서 성적이 좋은 학생들은 어딜가나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심지어 밥을 먹다가 잠에 빠질 정도로 밤새도록 공부만 하는 친구도 있었고, 하루 종일 수업을 듣는 와중에 잠깐 쉬는시간까지도 공부를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공부에 대한 강박관념 (Obsession)이 있어 보일 정도로 공부에만 사로잡혀 사는 친구들이 많은 곳이 의과대학이다. 공부밖에 모르는 바보인가 라는 생각이 들때도 있지만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 친구들이 나와 내 가족들의 건강을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하니 다행이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아무튼 의대에서의 공부량에 대해 논하라고 한다면 물이 콸콸 쏟아지는 호수를 입에 쑤셔넣고 받아먹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대체 이렇게 공부를 많이 시키는 곳에서 공부말고 다른 창의적인 일들을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앞뒤가 안맞는 것 같기도 하다 (연대의대에서는 학업 외 활동을 말로만 장려한다/ 사실 진짜로 장려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but 모든 교수님이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시지는 않는다는 거... 보수적이신 분들도 많으시다는거....). 자, 이제 누군가의 띵언을 언급하면서 글을 마무리 하겠다. "고등학교 때 공부가 무시무시한 괴물을 사냥하는 일 같았다면 의대에서의 공부는 무섭게 쫒아오는 괴물들을 피해 달아나야 하는 일과 같다"

도망갈 준비가 되었는가?


1등만 하던 당신, 의대에 입학해서도 1등 하고 싶은가? 하루종일 공부만 해라! 그냥 무사히 졸업만 하고 싶은가? 그래도 꾸준히 매일매일 공부를 해라!


의대는 어영부영 대충 공부해서 졸업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건투를 빈다. 나 스스로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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