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기분으로 지냈다. 예술을 하는 자도 공부를 하는 자도 아닌 채로 이십 년은 족히 보내온 것 같다. 나는 어렸을 때 시인이 되고 싶다고 엄마에게 말했지만, 당시 차 안에서,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크게 꾸짖음을 받았다. 그것을 기점으로 문학이나 예술을 할 생각엔 소극적으로 변해 갔고, 분당이라는 학구열 높은 도시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로 자라 예술이란 건 선택받은 아이들, 특이하고 특별한 아이들이 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살았다. 그런데 내가 가진 내면은 인식을 따라가지 못했다. 내가 이미 특이하고 특별하다면 그런 축에 속했다. 나는 도무지 밤 열한 시까지 자습실에 남아 펜을 굴리며 공부하는 고등학생 동기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대학에 가서도 학점관리를 한답시고 강의자료를 프린트해 달달 외우는 걸 잘하지 못했다. 어릴 적에 내가 재능이 있다고 진정으로 느꼈던 건, 음악시간의 작사였다. 초등학교 삼 학년 때 나는 여러 가지 기행을 부려서 사실상 따돌림을 당하는 아이였다. 학부모 커뮤니티에 맞벌이를 했던 부모가 참여하지도 못했으며, 이리저리 무리를 지어 누구를 괴롭히거나 구분 짓는 아이들의 무리 생성 방식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나처럼 소외된 두어 명의 친구들과 가끔 어울리며 보통 혼자 다녔다. 그 시기에 내가 유일하게 쓸모가 있다며, 조별 과제를 할 때 아이들이 나를 불러주었던 게 음악시간이다. 나는 마디와 리듬의 조화를 캐치해 작사하는 걸 잘했다. 당시 어린 내가 보아도, 나는 머릿속에서 낱말이 라임에 맞춰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데, 다른 아이들이 전부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 신기하고, 내가 특이하고 특별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까 예술을 할만한 축의 인간이 있다고 한다면 나였을 수도 있다.
매일이 외로웠다. 내 주변은 각종 신도시에서 특목고 입시를 위한 교육을 받고, 어떻게든 재수든 삼수를 거쳐서 명문대에 진학한 친구들 뿐이었다. 현재도 대부분 그렇다. 대기업에 입사하지 못한 친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낙오자 취급을 받았고, 이십 대 초반에 모여 피시방을 가면서도 어느 수준 라인의 대학을 가지 못한 친구들은 자기 인생을 책했다. 그러면 나는 어디 가서 명함은 내밀 수 있는 대학에 갔다는 사실을 스스로 떠벌리지 않아도 그러한 친구들의 자책을 거울삼아 엔도르핀이 도는 만족을 느끼곤 했다. 정말이지 지금도, 특정 이데올로기에 폐쇄적으로 세뇌당한 기억이라도 있는 것처럼 도무지 그런 잣대를 지우고 싶어도 말끔히 지워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자기혐오가 생긴다. 펜을 쥐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가 살았던 동네 분당은, 그리고 예상컨대 목동은, 강남은, 대치동은, 또 어느 도시의 어디는, 대학을 가고 가지 못하고 가, 전문직종이 되고 되지 못하고 가, 사람의 격을 판단하는 잣대라고 어릴 적부터 아이들을 교육시켰다. 이것은 마치 암살을 위해 기계처럼 길러진 살수가 뒤늦게 자아를 깨닫고 그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애써도, 과거의 트라우마와 사고의 틀을 정해둔 장치를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깨부수기 위해 했던 용기가 학교를 다니면서 예술에 발을 디딘 것이다. 우리 학교는 예술 전공이 없음에도 능력 있는 영화감독이 몇 졸업했다. 사실 그들 자신의 인생 중 우연히 우리 학교가 겹쳤을 뿐이지, 우리 학교의 어떤 대단한 지원이라든가 프로그램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 동문이니 그들과 같은 영화를 한다는 연결고리가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한 실오라기 같기도 했지만, 내가 속한 이 집단에서 그렇게 날아오를 수도 있다는 희망을 주기엔 충분한 사실이었다. 그 실오라기 때문인지 모여서 영화인을 꿈꾸는 친구들이 있었다. 몇 명은 예술종합학교에 진학해 지금도 영화인으로 살거나 그러기 위해 준비 중이다. 나는 뒤늦게 그 틈에 끼었다. 내게 그것은 숨겨진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깨어난 자들이 타고 다니는 우주선 같은 곳이었다. 나처럼 주어진 사명을 등지고 다른 세계로 뻗어나가려는 자들은 도대체 어디 있는지 헤매던 내게, 영화 동아리는 겉 보여주기보다 현재를 살아가는 나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방법을 충격적으로 알려준 곳이었다.
나는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카메라도, 시나리오도, 연출도, 조명도, 음향도, 로케이션이라는 말의 의미도, 후시도, 아무것도 몰랐다. 친구들은 이미 틀을 깨고 시작해 내 시선에서는 진정성 있는 의미의 어른으로 보였다. 사실 그 틀이란 건 나만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무력해지기도 했다. 왜 더 빨리, 방에서 컴퓨터만 붙잡고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게임만 할 것이 아니라, 원하는 세계로 몸 담그지 않았는지 후회가 되는 시기였다. 그래도 착실하게 그들을 따라다녔다. 촬영하는 방이 덥다면 문을 여닫으면서 환기를 시켰고, 스토리보드가 뭔지, 카메라는 어디서 어떻게 대여하는지, 구도는 어떻게 잡는지, 소리 녹음은 어떻게 하고 편집 프로그램은 어떻게 다루는지 모르는 것이 있다면 창피해하지 않고 물었다. 아마 이때 모르는 것이 있다면 조금의 아는 체도 하지 않고 도움을 구하는 좋은 습관이 생긴 것인지 모르겠다.
열심히 따라가려고 했지만 영화에 진심인 친구들을 따라가기에 나는 역부족이었다. 정확히는 연기가 하고 싶었는데, 나를 써줄 만한 영화도 없었고 그렇다고 프로필 사진을 찍어 소규모 영화 제작 커뮤니티의 구인 글을 뒤적이며 이메일로 지원서를 낼 용기가 없었다. 난 전공자도 아니며 연기를 배운자도 아니기 때문에, 내가 배우를 하고 싶거나 그러기 위해 준비한다면 주변이 비웃고 손가락질할 것만 같았다. 나는 세상의 명예와 권위를 뒤쫓는 살수로 자랐는데, 마당에서 꽃을 키우고 화려한 옷을 쫓으며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겠다는 시도가 무형의 그림자들로부터 지적을 받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렇게 이삼 년 정도 완전히 빠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포기하지도 못한 채, 내가 살았던 방식과 다르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반만 몸 담가 보는 방식으로 울음을 참고 보냈다. 내가 가진 열정이 배고픔을 인내할 만큼은 아니라고 결론짓고 — 이때도 예술인으로 성공하느냐, 그렇지 못하냐의 문제로 갈등했다. 성공 여부는 지독하게 내 판단에 개입했다. — 뒤늦게 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내가 어깨 위에 짊어진 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이라 할지라도, 부모의 기대 이십여 년 간 축적해 온 직장을 가진 인텔리 직군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 이미 그 직군이 되었거나 거의 되어가고 있는 지인들이 주는 불안감, 그리고 내적 욕망과 닦아져 있긴 했지만 남이 만들어진 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고뇌였다. 나는 앞에 닦아져 있는 길로 가기를 선택해 버렸다. 무엇이 되었든, 일단 돈을 벌자는 생각이었다. 예술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접은 꿈이 아니라 잠시 보류한 행위로써 자리를 잡으면 꺼내려고 내 마음 구석에 곱게 개서 준비해 두었다. 나는 그래서 글을 쓴다. 겉 보여주기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생각지 않고, 직장인으로서의 나와 예술세계에 있는 나는, 결국 겹쳐서 한 세계라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