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이, Y와의 나들이
나은이의 친구가 연희동으로 놀러 왔다. 나도 자주 봤던 Y다. Y는 성격이 예민해서 쉽게 사람에게 곁을 주지 않는다. 내가 아는 세계 외에서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겠으나 나은이가 나와 Y가 처음 만날 때 주의를 주었던 것이나, 대화를 할수록 예민한 성격이 나와 비슷한 그녀에게 조심해야겠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친해졌다. 끊어지지 않는 경어, 상대의 민감한 촉수를 건드리지 않는 대화법으로, 건드린다고 할지라도 서로의 더듬이를 뻗어 더듬이 끝부터 조심스럽게 맞닿는 방법으로 우리는 거리를 좁혔다. 오늘 만남이 다섯 번쯤 되는 날이었고, 나는 그동안 덜 털어놓았던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고백하고 그동안 궁금했던 그녀의 이야기를 더욱 깊게 물어보았다. 동네를 걷고 식사하고 차를 마시면서 우리는 각자의 예민한 구석은 예전의 상처로부터 비롯되었으나 각자가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 여정으로 나름 건강하고 힘차게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공유했다.
날이 좋은 봄날인지라 국립중앙박물관을 방문할 것을 나은과 Y에게 제안했다. 주차비가 저렴하고 입장권이 무료인 데다가, 쉽게 볼 수 없는 양질의 전시품들이 가득한 고귀한 장소였다. 전시관 밑의 공터도 크게 뚫려 용산이라는 차와 인파의 밀집 지역에 위치하면서도 서울에서 맛볼 수 없는 해방감을 선물하는, 숲 속의 아름다운 산장같이 사람들이 잘 모르는 나만의 비밀 공간이었다. 벚꽃이 아직 덜 져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유모차를 끌고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의 손을 붙잡고 온 젊은 부부들이 눈에 띄었다. 우리 셋은 서로 손을 잡지 않았지만 여타 부모들처럼, 서로가 아이이고 부모인 심정으로 사랑과 관심을 소재로 우정으로 연결되는 손을 잡은 채 국립중앙박물관을 돌아다녔다.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반가사유상이었다. 나는 올해 초에 이미 방문한 곳이었다. 사유하는 부처 조각상의 전시 공간은 통로가 넓은 입구로 시작해 특별한 스크린이 전초에 깔려 감상 서문에 깊이를 더했다. 안으로 들어서 황토벽을 손으로 쓸어내리면 속세와 단절된 목림에 닿은 것 같아 자기 무릎에 걸터앉은 부처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천천히 부처 주위를 돌았다. 걷다가 부딪히면 익살스러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장난을 쳤지만 각자 조각상을 보면서 서로 다른 특별한 심상을 그렸을 것이다. 나는 세상의 대부분의 고민을 짊어지고 있을 테지만 여유롭게 웃는 부처의 호기(好氣)를 느꼈다.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쁜 좁은 자기 세계로부터 초월해 세상에 줄기를 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퍼지는 미소로 느꼈다. 편견 없이 세상을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나은, 호불호가 있으나 건강한 삶을 위해 단순하게 받아들이고자 노력하는 Y, 옳고 그름에 얽매이나 지금부터라도 자유로워지고 싶은 나는 각자 다른 우주를 지니고 반가사유상 근처를 천천히 돌았다.
이어서는 기증 전시관을 돌았다. 그곳에 한국 전시품만 있을 줄 알았더니 베트남, 일본 등 대부분 타국 아시아 문화권의 예전 귀품들이 있었다. 박물관은 개인 소장에 그치지 않고 세상에 이를 공개하여 아름다움과 기품을 공유한 기증자들을 기렸다. 한두 점씩 모으던 것이 열 점이 되고 백 점이 되어, 이백 점이 넘는 물품을 기증한 분도 계셨다. 이들의 공통된 자세는 내가 가지고 있어 보았자 무슨 의미냐는 것이다. 기증을 결심을 하고 한품 한품 정성스럽게 닦아내고 고운 천으로 포장하여 박물관에 곱게 물건들을 집어넣은(보낸) 분이 계셨다고 한다. 다른 기증자의 전언이었지만, 잘 키운 딸을 시집보낸 기분이 들기도 한다고 하였으니 마치 그런 시원섭섭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평생에 살아있는 자식처럼 물건들을 바라보고 닦고 아꼈을 그분은 박물관에 물건들을 집어넣은 며칠 뒤 돌아가셨다고 한다. 세상에 자기 위주로 벼려진 흔적을 한 점 더 남기기보다, 자신의 일부가 잠시 스친 인연의 물건을 세상에 놓아놓고 떠나신 것이다. 내가 과연 세상의 바닥에 등을 대고, 육신을 벗어나 한 폭의 명주로 하늘하늘 세상의 위로 귀천할 때, 그만한 인연의 선물을 세상에 놓아주고 떠날 수 있을지 기증자들의 삶에 감동을 받았다.
마지막에는 영상관에 입장해 온갖 화사한 꽃 빔(beam)에 둘러싸였다. 천장과 바닥 그리고 사면에 화사한 꽃을 빛으로 수놓는 환상의 공간이었다. 나는 꽃들이 춤추는 그 홀에 넋을 뺏겨 이곳에서 액션 영화를 보아도 참 생동감이 넘치겠다는 엉뚱한 생각도 했다. 내가 넋을 뺏긴 동안 나은과 Y는 마주 보고 앉아 이 방에 대한 이야기인지, 이곳을 빠져나가고 발 디딜 식당에 대한 담소를 나누는 것인지 사이좋게 각자의 앉을 거리 위에 머물렀다. 나는 나은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꽃 빔을 마저 감상했다. Y는 우리 둘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우리 셋은, 이 중 둘은 전부터 알아온 친한 친구, 둘은 우연히 세상에서 마주쳐 결혼을 약속한 연인, 둘은 한 사람의 중개로 어색하게 만나 이제 각자의 터 안으로 조심스레 발 딛는 동료로, 꽃 속에서 같이 숨을 쉬었다. 더 내어주고, 삶을 나누고, 주변일 뿐이지만 가까이서 흔적을 어르어, 새끼 강아지들이 포개져 잠들듯 따듯한 낮잠을 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