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라갈수록 이권이 생기는 이상한 세계
한국에 살기 힘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가장 크다고 해놓고 이유 중 하나라는 표현을 좋아하진 않지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요소가 상당히 많아서 이리 썼다), 나이다. 나이 문화가 사람을 지치게 한다. 이것은 군대 문화와도 비슷한데, 올라갈수록 이권이 생기고 꼬우면 버티라는 식이다.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한다. 그러면 프로젝트 매니저, PM이 생기고, 소과제 단위로 소과제 담당이 생긴다. 그렇다면 소과제의 영역은 각자의 오너십으로 진전된다. 여기서 대원칙을 구축하고, 책임지고, 다방면의 의견과 사실을 확인해서 결정을 내리는 게 PM이다.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여기서 나이가 끼어버리면, 불순물이 낀 꼴이 된다.
나이가 회사 업무에서 근거가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회사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 학교, 가정 모두 그렇다. 1차 노동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경험이 실력의 지표가 될 수 없다. 실력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수많은 요소 중 하나가 우연히 경험인 것뿐이고, 각자가 맡은 영역 내에서 가장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건 당사자다. 이때 조력을 해주는 게 팀원의 역할이지 누가 잘났고 못나서, 못한 사람을 잘난 사람이 도와주는 게 아니다.
그런데 나이로, 회사에서 좋아하는 나래비라는 표현을 빌려, 나래비를 쭉 세워 실력 있고 없고를 정해버리면 액티브하게 움직여야 할 프로젝트가 세모 바퀴를 단 자동차처럼 우당탕탕 굴러간다. 때로는 주니어의 결정, 때로는 시니어의 결정이 서로를 보완해 가며 판단을 만들어가야 하는데, 어떤 시니어들이 이 룰을 어길 때가 있다. 내가 느낀 이유는, 정말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열등감에 기인한다. 피해의식이다. 본인의 과거에 대한 트라우마로 보이기도 해서 안쓰러울 때도 있다. 자기 의견에 반발하면 그것이 본인에 대한 도전이라고 오해한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바보 같은 예외를 차치하고, 의견을 공유함에 있어 나이를 고려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주니어는 의견을 내놓는다. 의견이 없다면 왜 없냐고 할 것이다. 결국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똑같이 말해달라는 게 일부 시니어의 요청이다. 그렇다면 고도화된 지식 체계 Pool에서 근무할 이유가 없다. 경험이 곧 실력인 1차 노동 현장에 투입되면 된다. 그런데 복지와 급여를 포기하지 못하고, 자존심을 챙기고 싶어 시대를 역행하는 요구를 하게 된다.
여기서 확실한 책임을 지겠다고 선언한다면, 나이가 아니라 직책으로 상위이고 결정권에 우위를 가져가겠다고 선언한 꼴이기 때문에, 난 그 혹은 그녀를 따른다. 그런데, 나이를 근거로 삼기 때문에 책임을 지겠다는 게 아니라, 결과가 어찌 되었든 자기 말을 들어달라는 것이라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마치 사촌형, 큰아버지가, 너 왜 나한테 존댓말 쓰지 않냐고 나무라는 것과 같다.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리기 위해 의견을 나누는데, 갑자기 예의범절이, 나이에 의한 상하관계가 개입한다. 이게 비합리적인 상황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그렇게 살아왔고, 그것으로 인한 피해를 예전에 겪었고, 이제는 누릴 시기이기 때문에 극복하지 못한다. 능력이 있는 자는 이러지 않는다. 능력이 없어 설득이 되지 않을 때, 자기 보호의 기재로 나이를 활용하는 것이다.
숫자로 비교하자면 끝이 없다. 키, 재산, 연애 횟수, 차의 가격, 학점, 학력, 모든 게 비교 대상이 된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비교를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지표는 실제와 관계가 없다. 현상을 실제와 다르게 간편히 정리한 게 숫자다. 나이도 그중 하나다. 선배 후배도 그래서 의미가 없다. 그래서 난 후배라고 보통 사람이 부르는, 신입 직원이 들어와도 구분 짓지 못한다. 구분 지어버리면 결국 내게 돌아오기 때문에. 나이를 근거로 하든, 키, 재산, 연애 횟수, 차의 가격이 됐든, 모든 류의 구분은 서로 상응해서 결국 우리 스스로를 옥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게 한국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