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어제 잠꼬대 엄청 하던데?"
"내가?"
"응, 거의 한 시간에 한 번씩은 깨 가지고, 계속 나한테 뭘 물어보더라고."
"정말??"
"응, 뻥인 것 같아?"
중간중간에 잠에서 깼던 것 같았지만, 잠꼬대를 한 기억은 없었는데
그만큼이나 피곤했나 보다.
찬 물에 세수를 하고 나니 정신이 좀 들었다.
오늘은 어딜 가볼까? 부녀가 번잡스러운 걸 싫어하기에 유명 관광지에 큰 감흥은 없었지만
지브리 미술관은 꼭 가보고 싶었다. 둘 다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의 팬이기도 하고
난 천공의 성 라퓨타, 딸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각각 큰 감동을 받았기에 그 마음은 더했다.
오늘은 여기에 꼭 가보자는 마음으로 검색해 본 결과, 매월 10일에 입장권을 예약 판매하는 준비된 자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아쉽지만 더 지체할 틈이 없다.
안 되는 건 단념이 빠른 편이라서 다음을 기약하고 미련 없이 다음 행선지를 찾았다.
지인들로부터 추천받은 곳들 가운데 츠타야 서점에 마음이 동했다.
후회 없을 곳이니 꼭 가보라는 추천 멘트까지 있는 곳.
이 서점은 몇 군데의 지점이 있는데, 우리가 가는 곳은 시부야 역과 가까운 다이칸야마 역에 있는 지점이다.
시부야까지 아홉 정거장, 환승해서 한 정거장이니 걷는 시간까지 더하면 30~40분이면 넉넉하게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책을 넣을 가벼운 배낭 하나와 보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호텔을 나섰다.
어제는 마음의 여유가 없어 잘 보이지 않았던 지하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지하로 깊이 내려가지 않았고, 역사 내의 층고가 낮은 편이었다.
긴자선을 오고 가는 열차는 노란색으로 역의 분위기와 함께 따뜻한 느낌이었다.
지하철 내부 공간은 서울과 비교하면 다소 폭이 작았지만, 사람들의 분위기는 비슷했다.
모두 조용히 음악을 듣거나,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더라도 조곤조곤하니 두리번거리는 사람은 우리와 같은 관광객들 뿐이었다.
다이칸야마 역에 내리니 도쿄 중심부와는 다른 풍경이다.
나지막한 건물과 주택가가 어우러진 거리는 듬성듬성 편집샾과 카페들이 있어 동네의 분위기를 한층
세련되게 만들어줬다.
'숲 속의 도서관'을 표방한 서점은 작은 숲과 공원을 요소요소에 배치한 3개의 건물로 되어있다.
각 건물은 1층은 현관을 2층은 건물 사이에 구름다리를 두어 서점, 숲, 공원, 카페를 유기적으로 연결시켰다. 분리된 공간이지만 하나의 공간처럼 조화롭게 구성한 셈이다.
어느 섹션을 찾아가도 비슷한 듯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여 지루할 틈이 없는 서점은
아이가 좋아하는 일러스트레이션, 내가 좋아하는 사진을 위한 공간 할애에 아낌이 없었다.
유명 사진가의 사진집은 작가별로 서가에 배치했고, 신간 서적은 스탠드에 두어 신예 사진가들을 소개했다.
바로 옆 공간은 건축 관련 서적을 두어 연결과 확장을 이어갔다.
회사 근처에 있는 교보문고의 사진섹션은 고작 두 개의 책장에 책들도 몇 년째 달라진 게 없음이 생각났다.
공간 활용과 사진에 대한 서점의 온도차가 이곳에 오니 더 아쉬웠다.
딸의 관심사인 일러스트레이션 분야는 사진보다 훨씬 더 다채로웠다.
그중에 최근 5년 간 발간된 연도별 일러스트레이션집이 인상적이었다.
그림은 사진보다 창작의 확장성이 커서 그런지 서가에 꽂힌 책들 하나하나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큰 애는 연도별 일러스트레이션집 두 권과 디테일과 묘사가 독특한 작가의 책을 한 권 더 샀다.
일본의 물가가 저렴한 편은 아니지만, 환율이 낮고 관광객에게는 택스 리펀드를 적용해 주니 굉장히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서점의 2층은 유료 라운지와 레스토랑을 서가 사이에 배치했는데 공간에 알맞은 톤과 조도의 차이를 둔 조명배치로 공간의 성격을 구분했다. 다이칸야마 츠타야 서점은 주변의 거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튀지 않으면서도 세심한 구성과 배치로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개발은 갈아엎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방증이다. 난 이 조화로움이 부러웠다.
지브리 미술관 대안으로 선택한 츠타야 서점은 여행의 마지막 날 한 번 더 찾아갈 정도로 좋았다.
(전날 사지 못한 일러스트레이션 책이 내내 눈에 걸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근처 카페에서 달달한 음료로 당을 충전한 우리는 다시 시부야로 향했다.